鄭洋의 홈



새벽편지 9. 나이타에 관하여. 김영춘 시인께 2004-03-28 05:28
작성자 : 鄭洋 


  

  나이타에 관하여
  김영춘 시인께

  지난 2월, 익산 동이리 근처의 어느 예식장 앞에서 나와 함께 피우던 담배 맛 기억 나세요? 그게 에쎄였던가 리치였던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우리가 그 예식장 입구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헤어진 건 기억하시죠? 그때 우리가 담뱃불을 붙이던 파란 나이타 는 아마 기억 못하실 겁니다 오늘은 그 나이타 얘길 좀 해보죠. 라이터가 표준말인가 본데 내 표준어는 나이탑니다. 그게 원래 내 꺼였는지 김선생 껄 내가 집어넣고 온 건지는 며느리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 파란 불티나 나이타는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다가 이곳 산동에 와서야 그 일생을 마쳤습니다. 얼마나 끈질기던지 몸 안에 기름이 다 바닥난 뒤에도 무려 나흘 동안 제 구실을 하더라구요. 버리기가 차마 아까워서 책상머리에 두고 가끔 한번씩 빈 손질을 해보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파란 나이타는 불은 안 켜지고 허벌나게 불티만 남겼습니다.

  생각해보면 40여 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돈 주고 나이타를 사본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설합 속에 있는 나이타를 깜박 잊고 연구실에서 다른 사람 나이타를 빌리는 일이 어쩌다 있었고, 그리고 술 취하여 집에 왔을 때 나이타가 없어서 주방에 있는 가스레인지에 담뱃불을 붙인 일도 없는 바는 아니지만, 하지만 그런 건 극히 드문 일입니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오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나이타가 서너 개씩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예사였고, 담배를 한 보루씩 살 때 껴주는 나이타도 부지기수였고, 가끔 누가 선물로 주는 나이타도 한 몫씩 거들고 했기 때문에 담배 떨어질 때는 가끔 있어도 나이타 떨어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이타 선물을 많이 받았지만 선물로 받은 나이타 치고 잃어버리지 않은 건 이제껏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배엽이가 연전에 주었던 끈 달린 지포 나이타도 한 달도 못 가서 그 끈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방에, 화장실에, 응접실에, 차 안에, 연구실에 나이타는 항상 지천으로 굴러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이타들은 대개 그 생명이 다하기 전에 내 손에 들어올 때와 비슷한 경로를 거쳐 누군가의 손으로 옮아가는 끊임없는 회전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튼 그 파란 나이타처럼 목숨이 다하도록 끝까지 나를 따라온 나이타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내가 그 나이타를 특별히 찰 챙겨서라기보다는 이곳에서의 내 생활이 그렇게 단조롭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김선생이 우렁이라면 이곳에서의 나는 정말 왕우렁입니다. 나는 그 불티만 나는 나이타를 보면서 우리 김선생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끔씩 불티처럼 혹은 곰곰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오늘, 아니 어제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그 파란 나이타가 안 보이는 겁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 방 청소하는 직원들이 다녀가는데 어제 토요일이 그 청소하는 날이었고 아무래도 그 청소 담당 직원들이 그 파란 나이타를 쓰레기로 처리한 것 같습니다. 좀 깊은곳, 은밀한 곳에 챙기지 못한 게 후회되긴 하지만, 잃어버리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냐 싶어서 별스런 충격은 안 먹기로 했습니다. 비록 파란 나이타는 잃어버렸어도 사실 나는 우리 김선생을 늘 은밀히 챙기고 있습니다. 그건 모르시죠?
  
  그 동네 봄날은 좀 아름다운가요? 배산도 미륵산도 다 안녕한가요?


-2004-03-28 05:28에 쓴글-



[2006-12-01 16:34:32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