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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13. 고당현의 산수화 한 점. 김병룔 선생께 2004-04-25 07:41
작성자 : 鄭洋 


  

高唐縣의 산수화 한 점

오동나무꽃도 다 시들고 요새는 아카시아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봄 앓이가 좀 심했던 것 같습니다. 봄날 다  지나고 신록이 짙어지면서
다행히 몸이 좀 풀렸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시간이 약이더군요.
잃어버린 봄날들이 무척 아쉽습니다.

몸 핑계로 그 동안 미루던 북경행은 영 미루고 말았습니다.
너댓 차례나 약속을 어기다 보니 다시 날 잡아보자고 연락할 염치도 없고
딱히 그곳에 가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또
그런 소문난 명승지들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다닐 기회가 있겠다 싶어서
그리고 또 계획대로 다닌다면 돈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서
이곳에 있는 동안 중국의 명승지들을 대충 다녀보겠다던
종전의 계획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이 아니라면
가 보기 어려운 곳들, 중국의 평범한 시골길들이 명승지들보다
더 가봐야 할 곳 아니겠나 싶었습니다. 지난 가을 평양에 갔을 때
못했던 일을 여기서라도 한번 시도해보려고 맘먹은 겁니다.

이곳에서 나하고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어과 3학년 남학생인데, 일 주일에 세 번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중국어를 배우는 일보다
그 학생의 서툰 한국말을 바로잡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는
중국어를 거의 배우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좀 답답하고 말지
이 나이에 그거 쪼께 배워서 뭐하겠습니까?

부예서(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러 다니는 학생)는 국가적 자존심이 강하고
진지하고 순박해서 나에게 어떻게든 중국어를 가르치려 하고
나는 어떻게든 뺑돌거려서 그의 진지한 계획들을 번번이 무너뜨리곤 합니다.
아시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뺑돌거리는 건 내 어려서부터의 장낍니다.
나는 부예서의 진지한 계획을 마침내 무너뜨리고 그 대신 일 주일에 한 번씩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고당현 외곽의 농촌에서 태어난 부예서는 23살이 되도록 산이라는 걸
한 번도 본 일이 없답니다. 태어난 이후 끝도 안 보이는 들판 속에서만 자랐고
이곳 지난시 역시 들판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 번도
바다 구경을 해본 일도 없고, 기차를 타본 일도 없다고 합니다.
졸업 후 한국계 회사에 취직해서 융자받은 등록금 갚고, 빚에 허덕이는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돕고, 그리고 애인과 함께 도시생활을 하는 것이
부예서와 이곳 한국학과 학생들 대부분의 거의 공통된 꿈입니다. 부예서는
초등학교 학생 영어를 가르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지냅니다.

우리는 먼저 부예서의 고향인 고당현에 갔습니다. 長途버스(시외버스)로
한 시간 반쯤 걸립니다. 한사코 동쪽으로만 흘러가는 황하를 끼고
그 뚝길을 거슬러가던 버스는 황하를 따돌리고 마침내
밀밭이 끝없이 넘실거리는 들판으로 접어듭니다.
좌석이 좀 비좁고 딱딱한 버스, 그러나 사람들 눈치 안 보고도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다행인 완행버스는 끝이 안 보이는
밀밭과 시골마을과 밀밭 사이에서 자라는 백양나무 묘목들 속으로
쉬엄쉬엄 달립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멈춰서 승객을 태우기도 하고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우기도 합니다.

들판 사이사이에는 잘 정비된 수로들을 통해서 비교적 맑은 물,
틀림없이 붕어나 메기 같은 낯익은 물고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수로의 밑바닥이 다 들여다보이지는 않지만 그 밑바닥이
어느 정도 짐작은 되는 맑은 물들이 물고기들 대신 넉넉하게 흘러다닙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 길에서 보이는 시골집들은 그 모양새가 한결같습니다.
적벽돌 벽에 그 비슷한 색깔의 시멘트 기와를 얹은 그 시골집들은
규격화된 점에서 언뜻 북한의 시골집들과 꽤나 닮아 있습니다.
북의 농촌에서 흔히 보이던 구호들 대신 상업적 광고 간판들이
길가에 서 있는 시골집 벽에 가끔씩 보입니다. 술 광고, 약 광고, 그리고
주방용품 광고와 농업용 기계 광고들이 많습니다.  

쓰다보니 날이 이미 밝았군요. 읽어주시거나 말거나
내일 새벽에 이어가겠습니다.



-2004-04-25 07:41에 쓴글-

[2006-12-01 16:37:2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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