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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14. 고당현의 산수화 한 점. 김병룔선생께 2004-04-26 08:16
작성자 : 鄭洋 




  버스에서 내려 어디를 가고 싶냐고 부예서가 묻습니다. 아무데나 가자고, 우선 좀 걸어보자고 나는 버스 정류장 주변의 간판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무슨 조사라도 나온 사람처럼 수시로 발걸음을 멈춰가면서 간판이나 가게 안을 일일이 기웃거렸지만 사실은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습니다. 아무 데나 가도 된다는 널널함 때문에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겁니다.
  
  좀 야하다 싶은 여자 그림이 그려진 간판 앞에서 내가 한참이나 발길을 멈추고 있었더니 부예서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만 가자고, 그런 데는 나쁜 데라고 내 팔을 당깁니다. 나그네의 휴식을 위하여 전신 맛사지를 해주는 곳 같았습니다. 왜 나쁜 데냐고, 아주 좋은 데 같다면서 내가 자꾸 뒤돌아보니까 야릇하게 웃는 부예서의 얼굴이 더 붉어집니다. 그런 비슷한 간판들을 몇 개 더 아쉽게 지나쳤습니다. 우리 김병룡 선생하고라면 몰라도 사제간에 함께 갈 만한 곳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우선 고당현의 대표적인 시장에 가보자고 했더니 부예서는 나를 그 근처의 대형 마켙으로 안내합니다. 이런 시장 말고 재래시장으로 가보자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리 아프실 테니까 택시를 타고 가자는 부예서더러 나는 볼 게 많다고, 그냥 이대로 천천히 걷자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나 야한 그림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고당현은 차도 사람도 별로 많지 않고 하늘이 제법 파랗고 공기도 맑습니다. 밤에는 아주 많은 별들이 반짝인다고 합니다. 택시를 타려는 눈치만 보이면 언제든지 재꺽 달려오겠다는 듯이 택시나 삼륜차들이 주변에 빌빌거립니다. 제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삼륜차들이 이곳에는 택시보다 많습니다. 옛날 인력거를 연상하게 하는 삼륜차는 택시보다 값이 쌉니다. 택시는 6원, 삼륜차는 3원.

  우리 주변을 빌빌거리는 택시나 삼륜차를 외면하면서 우리는 고당현 중심가로 들어섰습니다. 대형 호텔이 두 개 보였고 ‘時風’이라는 대형공장이 중심가에 넓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 소형 화물자동차나 트렉터나 기타 농기계들을 만드는 공장이라는데 고당현 젊은이들 대부분이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마침 점심 무렵이어서 거리에는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공장 직원들이 눈에 띄게 많습니다. 부예서의 동생도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점심은 당나귀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음식이랍니다. 미역인지 다시마인지 하여튼 그 비슷한 게 몇 가닥 섞인 국물 한 그릇, 구운 고추 한 접시, 그리고 당나귀고기를 다져서 속에 넣은 커다란 호빵들이 식탁에 오릅니다. 호빵 한 입에 구운 고추 한 조각 씹고 국물 몇 수저 떠먹고...  두어 번 하다가 나는 마침내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고기도 국물도 구운 고추도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중 나은 게 구운 고춘데, 그것도 매운 맛만 거칠게 입안에 바삭거립니다.

  이곳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음식을 먹어보자고 제안했던 나로서는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미안하게 여기는 부예서에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할 뿐. 개고기 파는 데는 없냐고 물었더니 산동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고기의 맛을 싫어해서라기보다는 먹으면 재수가 없다는 미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수 없더라도 먹어 볼 수 없냐니까 그런 음식점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부예서네 집은 여기서 15키로쯤 밖에 있는 시골이라고 합니다. 여기 온 김에 집에도 좀 다녀오라고, 그 동안 전신 맛사지나 받겠다는 내 제안을 부예서는 농담으로만 여깁니다. 날더러 유머가 참 많으시다면서 이번에는 낯도 안 붉히고 활짝 웃습니다. 자기도 유머를 좀 하겠다고, 절대로 선생님을 이곳에 혼자 두지 않겠다면서 부예서는 전혀 집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참 절망적인 유멉니다.

  이곳 재래시장은 넓고 길고 한산한 편입니다. 각종 농산물과 옷가지들, 그리고 농기구 상회가 특히 많습니다. 전주의 재래시장 같은 오밀조밀한 맛이 없습니다. 별로구나 별로구나 속으로만 뇌면서 끝까지 돌았습니다. 튀밥 튀는 소리가 들리고 옥수수냄새가 잃어버린 밥맛을 돋구다 말았습니다. 기름집에서 참기름(여기서는 香油라고 합니다)이라도 한 병 사려다가 들고 다닐 일이 꺽정스러워 그만두었습니다.

  삼륜차로 호수에 갔습니다. 덕진호수보다 대여섯 배는 넓어 보입니다. 물이 아주 맑고 주변 시설들이 깔끔하고 호수 건너편 고풍스러운 집 두어 채가 잘 어울립니다. 일부러 고풍스럽게 지은 집이 아니라 명나라때의 무슨 재상의 집이었답니다. 호수 주변에 ‘李逵井’ 이라는 우물도 기념비와 함께 쇠울타리로 둘려 있습니다. 수호지에 나오는 낯빛이 검고 쌍도끼로 유명한 이규, 그 이규가 마시던 우물이랍니다. 소설 속의 인물을 실존 인물로 여기기는 여기나 거니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일이지요. 호수 중심에 작은 섬도 있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1키로쯤 돼 보이는 구름다리의 곡선이 한결 멋스러워 보입니다. 너무 넓어서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려던 당초의 계힉을 포기하고 나오다가 古玩店에 들렀습니다.

  청동그릇, 도자기, 옥으로 된 조각품, 서화 들을 둘러보는 나에게 50대쯤 보이는 통통한 주인 사내가 다가와 뭐라고 말을 겁니다. 무슨 물건을 찾느냐고 한답니다. 서화 중에서 현대 중국의 유명한 작품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주인은 냉큼 안으로 들어가 둘둘 말려 있는 서화뭉치를 들고 와서 펼쳐 보입니다. 모두 한 사람의 작품들입니다. 별로구나별로구나 여기다가 마지못해 그 중 산수화 한 점을 골라 얼마냐고 물었더니, 설합 속에서 화가의 약력, 사진 등이 인쇄된 팜플렛을 꺼내 보입니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바로 주인 사내였습니다. 좀 난처하긴 했지만 내킨 김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삼백원이랍니다. 달라는 대로 다 주기도 그렇고 그림을 그린 화가 본인과 직접 흥정을 한다는 것도 멋쩍은 일이고 해서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잊고 있는 중인데 부예서군이 주인에게 내 소개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 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韓國, 著名, 詩人’ 등입니다. 한국도 저명도 시인도 나에게는 참 부끄러운 말들입니다.

   5시 반쯤 일어나 편지 쓰기를 시작했는데 벌써 7시군요.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전에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읽든 말든 내일 또 쓰겠습니다.



-2004-04-26 08:16에 쓴글-


[2006-12-01 16:37:5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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