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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북녘 7 일없습네다. 같이 가시자요 (2003.11.27)
작성자 : 鄭洋 


   일없습네다.같이 가보시자요

   이병천 피디는 20층에 있는 2인실에서 잤고 나는 나이 든 대접을 받느라고 21층에 있는 특실에서 혼자 잤다. 내 코 고는 소리로 옆 사람 시달릴 걱정 때문에 나는 남과 함께 잠들기를 늘 꺼려하는 편인데, 넉넉한 응접실도 있고 위생실(화장실)도 두 개씩이나 딸려 있는 이 특실에서는 그런 걱정으로부터는 일단 자유롭다. 그래도 역시 이병천 피디가 옆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

   맥주에 취해서 잠들면 나는 꼭 새벽에 깬다. 오줌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에는 그 버릇 때문에 집에 든 도둑을 쫓아낸 일도 있다. 전주 진북동 셋집에서 살 때는 새벽에 오줌 싸려고 일어났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오줌 싸다 말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메는 가족들을 살려내기도 했었다.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을 때 지금도 나는 더러 그 맥주를 애용한다. 간밤에 마셨던 대동강 맥주 덕분에 나는 계획대로 4시 반쯤 잠에서 깼다. 전주에서 못 잔 잠까지 이틀 치를 한꺼번에 잔 셈이다. 아마 서너 시간쯤 잤을 것이다. 아직도 머리가 무겁다.

   커튼을 열고 새벽의 평양 시가를 내려다 본다. 북에 와서 맞는 첫 새벽이다. 호텔에서 멀리 건너다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불 켜진 창들이 더러 보이고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넓은 길에 전차가 느리게 지나가고 있다. 평양에는 3,4십 층쯤 높아 보이는 고층아파트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 그것들이 남쪽처럼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지 않고 한 채씩 한 채씩 한참씩 떨어져서 있다. 남쪽의 아파트들처럼 직사각형의 건물이 아니고 한 채 한 채가 둥글둥글한 형태로 여기 저기 우뚝우뚝 솟아 있다. 일조권 같은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평양 시내 아침 전경

   조운선생 유족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도 불가능한 일인지, 소식이라도 알 수는 없는지,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컴퓨터 두어 번 두드리면 쫙 올라올 그런 자료일 텐데 연구자료 확보하는 것쯤 뭐가 또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기대했던 장혜명 시인이 못내 원망스럽다. 아니, 사람 탓이라기보다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북녘의 무슨 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답답하다.

   3층 식당에서 아침 대신 시래기 국물을 한 그릇 마시고 나왔더니 출발 시간이 30분이나 남는다. 호텔 코너에 있는 책방에 들렀다. 내 연구실 만한 크기의 책방이다. 두꺼운 표지로 만든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된 책들이 맨 윗줄에 꽂혀 있고, '50년대 무렵에나 흔히 보이던 형태의 얇고 험한 책들이 모두 그 아래 정리되어 있다. 시집이나 소설책은 어쩌다 한 권씩 그 사이에 섞여 있는데, 내가 알 만한 이름의 시인이나 소설가는 도무지 없다. 시조집도 시조에 관한 책도 조운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전문서적들은 여기 없어요? 한복을 입은, 좀 퉁명스러워 보이는 책방 점원 선생에게 내가 물었다. 이게 다 전문서적입네다. 무슨 책을 찾습네까?  예, 저 학문적 서적 말입니다. 그딴 거 나는 잘 모르가씨요, 잘 찾아보시라요. 평양 시내에 대형서점은 어디쯤 있나요?  나는 잘 모르가씨요, 안내원 선생에게 물어보시라요. 나는 민요 민담 전설 등과 관계되는 얇은 책들을 십여 권 골라 점원선생에게 맡겼다. 이따가 저녁에 와서 더 고르고 책값도 그때 드릴게요. 계산 안하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일없습네다. 잘 다녀오시라요.

  '일없다'라는 말이 북에서는 '괜찮다'라는 뜻인 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그 '일없다'라는 말을 북에 와서 나는 벌써 여러 차례 들었다. 북에서는 자주 쓰는 말 같았다. 어제밤 술값을 계산할 때 잔돈 안 받으면 안 되느냐고 물었을 때도 일없습네다. 접대원 선생은 웃는 얼굴로 게산기를 두드려 잔돈을 내주었었다. 그게 괜찮다라는 뜻인 줄 알면서도 그말이 나에게는 아직도 자꾸 퉁명스럽게만 여겨진다.          
                   
  오늘은 묘향산에 간다고 한다.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젊은이들과 함께 산에 오를 일이 걱정이다. 산길이 얼마나 험하냐고, 걱정된다고 옆에 앉아 있는 안내원 선생에게 물었다. 일없습네다. 버스에서 내려 평평한 길을 조금만 걸으시면 됩네다. 아, 그래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참, 평양 시내에는 큰 책방이 어디쯤 있어요?  사고 싶은 책들이 좀 있는데... 평양에는 그딴 거 없이요, 호텔이나 공항 책방에서 사시라요.


묘향산 가는 길에 본 차창 풍경...차를 고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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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정상 책방에 안내할 수가 없어선지 아니면 정말로 평양에 대형서점이 없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평양 만한 도시에 큰 책방이 없느냐고 다시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이따가 밤에 나와 함께 평양 시내에 있는 큰 책방에 같이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내가 물어본다면, 그리고 안내원 선생이 거침없이 일없습네다 같이 가보시자요 라고 퉁명스럽게라도 대답한다면 묘향산 가는 길은, 우리의 이동식 가두리는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자꾸 하품이 난다. 아까 마셨던 시래기 국물 냄새가 입안에 텁텁하게 고인다.        

[2006-12-01 16:21:1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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