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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북녘 9 빼앗긴 묘향산<2> (2003.11.27)
작성자 : 鄭洋 


빼앗긴 묘향산<2>

  언제부턴가 배가 고프다. 내 배 고프든 말든 국제친선전람관을 간신히 빠져나온 일행들은 또 그 근처에 있는 보현사로 간다. 보현사 전경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 밑에서 그곳 강사 선생의 '위대한'으로 열리는 강의가 또 시작된다.

    






보현사 풍경들


  중학교 때  우리 국사 선생님은 말씀 중에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가장 짧은 시간에 발음해버리는 분이다. 입술이 한 번 가볍게 열리는 듯하는 순간에 '말하자면'을 쏟아버린다. 나를 포함해서 몇몇 아이들은 국사 시간만 되면 일삼아서 노트에 正字를 그어 '말하자면'의 횟수를 기록한다. 한 시간에 백 번을 넘기는 일이 허다하다. 正字가 스무 개를 넘으면서부터 교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正字 표시를 하지 않는 아이들도 대충 감은 잡고 있다. 누가 웃음을 못 참고 킥킥거리는 소리라도 낸다면, 그래서 한꺼번에 웃음보가 터져버리는 날에는 보나마나 단체기합을 받아야 한다.  
수업 끝나고 선생님이 저만큼 사라진 뒤에 正字 표시를 서로 비교하면서 우리들의 웃음보가 터지곤 했었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숫자는 잘 센다고 서로 놀리기도 했다. 나는 전람관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가 듣는 '위대한' 이라는 말의 숫자를 대충 헤아려 보았다. 100회를 넘기면서부터 나는 숫자 헤아리는 일에도, 혼자 피식거리는 일에도 스스로 지쳐버렸다. 함께 킥킥거릴 동지도 없이 숫자만 헤아리는 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적인 노릇인가. 내가 숫자 헤아리기를 포기해버린 뒤에도 '위대한'은 여전히 내 귀에 못을 박았고 그 때마다 나는 절망적으로 고독했다.      



보현사에서 내려오는 계곡


  보현사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계곡 사이 숲 그늘에 우리들의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참으로 화려한 점심이다. 발을 좀 담가보고 싶어도 발 담그기가 민망한,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맑은 물을 끼고 앉은 숲 그늘 속의 우리의 도시락은 어느 진수성찬보다 달았다. 안내원 선생 하나가 계곡 건너 숲 속으로 들어가서 반짝반짝 윤나는 똘밤과 잘 익은 파란 다래를 한 바가지 주워왔다. 내가 맡은 그 바가지는 금세 바닥이 난다. 사진 잘못 찍는다고 날더러 머퉁이를 해쌓는 똘밤똘밤한 연출가 선생이 이번에는 그 똘밤도 다래 한 톨도 못 남겼다고 또 머퉁이를 할 것만 같다.

해맑은 웃음의 접대원 선생


안내원 선생이 따다준 똘밤과 잘 익은 파란 다래. 금방 동이 났다.


점심시간 풍경


  점심 후 잠깐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쉬는 시간이라는 게 우리 점심 먹은 자리를 안내 선생들이 치우는 시간이다. 우리가 버스로 내려왔던 길로 체육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걸어서 올라가다 말고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든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를 목청껏 외치는 양쪽의 목소리들이 계곡에 울린다. 몇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들에게 접근하더니 이내 손을 맞잡고 한 데 어울려 사진들을 찍는다. 그쪽 인솔교사도 환하게 웃으며 이쪽 학생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손을 흔들고 한다. 점심 쓰레기를 치운 안내 선생들이 다가와 어서 출발하자고 서두른다. 또 만나자고 통일하자고 서로 소리지르며 그들과 헤어졌다.

묘향산 계곡에서 북한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는 그렇게 묘향산을 내려왔다. 만폭동의 수많은 폭포로 유명한 묘향산, 곱기로 소문난 묘향산 단풍은 아직 철이 아니어서 못 본다 치고, 10층폭포도 3층폭포도 그 수 많은 폭포 중의 어느 하나도 못 보고 돌아서는 등 뒤가 자꾸만 허전하다. 천하 명산이라는 묘향산을 누군가에게 몽땅 빼앗긴 것만 같다. '위대한'을 곱씹던 목소리들이 귓속에 아직도 이명처럼 남는다.

[2006-12-01 16:23:2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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