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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집의 새벽편지 4 2004-03-02 06:15
작성자 : 鄭洋 





3월 2일 비, 바람.
나는 바보인가

  지난 겨울 전주 홍도 주막집, 몇몇이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옛날 신흥고등학교 제자였던 김상배라는 사내를 만난 일이 있다. 옛날에 내가 주례를 했던 녀석, 고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의 아버지, 지금 남원의 어느 학교 윤리선생이다. 녀석은 자꾸 내 코 앞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날더러 많이 변하셨다고 감탄 섞어 되풀이되풀이 했다.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이 자식아. 안 변하나’ 나는 내심 못마땅해서 투덜거리듯 대꾸하고는 눈을 내리깔고 말았는데, 이 녀석 한다는 소리가 그게 아니고 내 얼굴이 옛날보다 몰라보게 깨끗해졌다고 또 감탄을 보탠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 깨끗해졌다는 말에 못마땅했던 속이 금방 좀 풀리는가 싶었는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옛날에는 내가 세수를 자주 안 했기 때문에 얼굴 주름살마다 때가 끼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때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내 얼굴을 더 짯짯이 훑어보면서 요새는 세수를 자주 하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이 녀석이 날 망신시키려고 작심이라도 했나? 나는 옆 자리에서 우리를 흘끔거리는 사람들한테, 그리고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민망해서 맛있게 먹은 홍어회 맛이 얼굴로 확확 달아올랐다. 그만 마시고 어서 나가라고 나는 밀어내듯 녀석을 내몰았다.
  70년대 무렵, 술이 덜 깬 아침, 아닌 게 아니라 세수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출근했던 적이 나에게는 가끔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설마 학교 선생 얼굴에 주름살마다 때가 끼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녀석들이 내가 세수하지 않은 채 출근한다는 정보를 알고는 즈그들끼리 나를 우스개 삼느라고 키득거리던 짓이었을 것이다. 녀석들 하고는 참......
  날마다 바람만 사납게 부는 이곳 날씨 탓인지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물 탓인지 몇 날이고 며칠이고 가라앉을 줄 모르는 황사 탓인지 요즘 내 얼굴의 주름살마다 그 때가 낀 것처럼 보인다. 정말 때인가 싶어 짯짯이 살펴보면 분명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얼핏얼핏 꼭 때가 끼어 있는 듯이 보여서 그 때마다 번번이 상배 녀석 생각이 나곤 한다.
  이라크 파병이 취소되려는지 미군 이전비용은 안 물어도 되는 건지, 결리던 옆구리도 풀렸고 부었던 잇몸도 가라앉았다. 날마다 거칠게 부는 바람과 황사 속에서 희한하게도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 일찌감치 먼저 피어 있던 영춘화(개나리 비슷한 꽃)를 앞세워 매화꽃 살구꽃 복사꽃, 아아 그리고 목련꽃 또 목련꽃...... 전주보다 한 달쯤은 빠르지 싶다. 사진들만 부랴부랴 찍어놓고 이 디카를 어떻게 컴퓨터로 홈피로 옮기는지 아직도 나는 모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왜 이렇게 꽃 피는 게 빠른지, 이 찬바람 속 모래먼지 속에 어떻게 저렇게 고운 꽃이 피는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로 바보인 것만 같다. 바보가 자기더러 바보인 것 같다고 하는 건 더 바보스런 짓인가.


[2006-12-01 16:31:0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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