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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뒤지는 날 (2003.4.8)
작성자 : 鄭洋 


<馬峴里詩>
   술 뒤지는 날


  술이 잘 안 팔린다 싶으면 면소재지 주조장에서
  세무서에다 빽을 넣어 술을 뒤지게 합니다
  세무서에서 느닷없이 술 뒤지러 나온 날은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힙니다 술만 뒤지는 게 아니라
  누룩 부스러기까지 다 뒤져서 없는 살림에
  아주 망해버릴 만큼씩 벌금을 물립니다

  술은 감춰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세무서 직원들은
  술냄새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들킬 술이 없는 집은 누룩 감추기에 바쁩니다
  두엄자리 속에도 베개 속에도 감추고
  항아리 바닥에 넣고 그 위에 보리를 부어두기도 합니다
  벼라별 짓 다 해봐도 세무서 직원들은
  누룩 냄새도 귀신 같이 밝습니다

  술이나 누룩 들킨 집에서는 주로 아낙들이  
  한번만 봐달라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세무서 직원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공무집행방해죄가 뭔지나 아냐고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놓으라고 반말로 을러메거나 말거나
  사납게 뿌리치는 발길에 차이거나 말거나
  그렁 거 나는 몰라유 한번만 봐줘유 사생결단 매달립니다

  복철이네 어머니가 몇 차례나 발길에 차이면서
  바지가랭이에 매달리는 방앗간 앞
  들킨 술독 세 개가 나란히 놓인 길 옆에
  흙먼지 몰고 온 녹색 찦차가 서고
  까만 금태안경에 녹색 화이버를 쓴 군인 하나가
  성큼 차에서 내려섭니다
  육척 장신의 늠름한 가슴팍, 빨간 별이 달린 계급장  
  울긋불긋한 훈장도 몇 개씩 달고 있는,
  엠완총을 묵직하게 둘러맨 특무상사,
  통쟁이집 큰아들 용봉이가 휴가를 왔습니다

  
  화이버를 쓴 채 안경만 벗은 용봉이가 삥 둘러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사람을 많이 죽여서 디룩거리는 눈알이 저렇게 토끼처럼 붉다고 합니다 디룩거리는 붉은 눈으로 세무서 직원들을 쏘아봅니다 이 캐새끼들 일루 와보라우, 안 들리나? 철커덕 철컥, 엠완총을 내려 탄창을 끼웁니다 콰당탕콰당콰당탕, 총소리가 순식간에 마을을 흔들고 먼 들판으로 잦아듭니다 세무서 직원들이 벌벌 떨며 특무상사 앞에 다가가 한 줄로 섭니다  특무상사가 까만 장부를 빼앗습니다 사납게 찢은 장부를 세무서 직원들 낯바닥에 후려칩니다 정강이도 걷어찹니다
  이 캐새끼들, 예가 어딘 줄 알고 민폐를 끼치나? 엎드려, 원위치, 원산폭격, 안 들리나? 대가리 안 박나? 이 마을 말투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저게 아마 서울말일 거라고 짐작하면서 가만가만 흉내를 내봅니다 이 캐새끼들 일루 와보라우 원위치 안 들리나 대가리 안 박나
  철프덕 철프덕 엠완총 개머리판으로 엉덩이를 맞던 세무서 직원들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을 싹싹 비빕니다 원위치, 원위치, 안 들리나? 대가리 박고, 이 캐새끼들 여기 또 올끼가? 아닙니다 다신 안 옵니다 맹세합니다
  같은 동작 같은 말을 몇 차례나 더 주고받은 뒤 용봉이가 세무서 직원들을 놓아줍니다 절름거리며 떠나는 세무서 직원들 등뒤에서 복철이네 어머니가 용봉이를 끌어안고 큰 소리로 엉엉엉 흐느낍니다 복철네 엄니, 고생 많었지유? 인자 분이 조께 풀려유? 갑자기 말투를 바꾼 용봉이가 복철이네 어머니 등을 다독입니다 말투가 바뀐 탓인지 복철이네 어머니 울음소리가 더 커집니다 아이들이 삥 둘러서서 '특무상사 만세'를 삼창 또 삼창합니다
  통쟁이 영감님이 헛기침을 큼큼거리며 늘어선 술독들을 곰방대로 때려봅니다 이게 누구누구네 술이여? 마침맞게 술들 잘 익었구마잉, 우리 용봉이 휴가 왔승게 오늘 이 술들 내가 다 살랑만, 누가 가서 술잔허고 안주허고 좀 가꼬 오더라고, 아 쌔기쌔기 좀 가꼬 와, 야뜰아 느그뜰도 오늘은 이 술 한 잔썩 혀봐라 술은 꼭 으른들 앞으서 배워야 허는 벱이다.
  
  아이들이 다시 특무상사 만세를 삼창합니다
  눈물 글썽거리는 복철이 목소리가 제일 큽니다

[2006-12-01 16:00:4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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