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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북녘 4 야만의 나라 (2003.11.25)
작성자 : 鄭洋 


  야만의 나라

  우리 일행은 여섯 대의 버스를 나누어 타고 호송차량을 앞세워 숙소인 청년호텔로 향했다. 30층이 넘는 청년호텔은 평양시 청춘의 거리 한켠에 우뚝 솟아 있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가지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바깥 풍경 좀 찍지 말아달라고 안내원 선생이 우리에게 부탁한다.(북에서는 왠만하면 선생이라는 호칭을 즐겨 쓰는 것 같다. 안내원은 안내원 선생, 접대원은 접대원 선생, 단장은 단장 선생, 이병천 피디는 연출가 선생, 날더러는 교수 선생이라고들 불렀다. 님짜는 경우에 따라 붙이기도 떼기도 했다.) 안내원 선생의 부탁을 듣고보니 아닌게아니라 차창 밖은 모두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은 풍경들이다.


개선문에서 바라본 평양시내

  산악지대가 많은 북녘에서 平壤은 말 그대로 평평한, 땅이 넓은 곳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던 시조도 있지만, 황금물결 출렁이는 아득한 들판은 나로서는 언제 어디서든 정겹다. 길은 넓어도 나다니는 차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중앙선이 있지만 그걸 지키라고 그어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들은 필요하면 그 중앙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참씩 넘나들곤 했다.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들과 드문드문 눈길을 끌던 붉은 구호들이 평양이 가까워지면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차량들도 조금씩 늘었다. 사람을 싣고 가는 게 아니라 구호를 싣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글씨의 구호가 휘감긴 버스나 이층버스나 전차, 뒷칸에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화물차, 소형승용차는 보이지 않았다. 중형승용차들이 어쩌다 하나씩 지나갔다. 길 한가운데서 태연하게 차를 세워놓고 차를 수리하고 있는 풍경도 이채로웠다.


평양시내 전경

  
  길가던 이들도, 전철이나 버스나 전차를 기다리는 이들도, 버스나 전차에 타고 있는 이들도 우리를 금방 알아보는 것 같았다. 지나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흔들곤 했다. 그들 중에는 우리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책을 읽으며 걷는 이, 우리를 흘낏 돌아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는 이,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일행들 중에도 그런 풍경들에는 아랑곳없이 그저 끄덕끄덕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평양의 전동차 모습

  북녘 사람들의 옷은 대체로 디자인이 단순했고 검소하고 단정했다. 어른 남자들은 거의 다 인민군 군복보다 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다녔다. 인민복인지 노동복인지 생활복인지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의 종류를 나누어 본다면 아마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대구 체육대회 때 미녀 응원단이 입고 왔던, 옷고름이 긴 흰 저고리 검정치마는 아마 여대생 복장인 듯, 어쩌다 한번씩 보이곤 했다.

       아이들 셋이 물가에 나와서 뭔가를 물에 던지며 놀고 있다.
  
  색안경을 끼고 걷는 이들이 많았다. 남에서는 야외에 나가 멋을 부리고 싶거나 눈길을 감추고 싶을 때 더러 색안경을 끼곤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북에서는 남녀간에 색안경 끼고 걷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 매연이 적고 그 공해가 적어서 자외선이 두텁고 햇살이 유난히 따갑기 때문에 그 햇살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안내원 선생이 설명해준다. 차량이 드문 평양 거리를 보고 자동차회사들이 군침을 흘리는 것처럼, 북녘의 따가운 햇살은 안경점 주인들이 또 눈독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한국전쟁 때 융단폭격을 당했다더니, 평양이 古都인데도 옛날집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내가 좀 아는 체를 했더니 안내원 선생이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덧붙인다. 그 해방전쟁 때 인구 일인당 폭탄 하나씩 맞았습네다. 평양이 다 잿더미 됐댔시오. 미제라면 이가 갈립네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에 따라 오늘날 이케 일궈냈습네다. 전차 정거장에 서 있던 사람들과 서로 손을 흔들며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를 주고 받는 바람에 안내원 선생의 말이 더 이어지지 못했다.
      
    
평양 시내 전경들
                
  손 흔들려고 평양에 온 사람들처럼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일삼아 손을 흔들었다. 차창에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지만 누구도 커틴으로 그 햇살을 가리려 들지 않았다. 평양 중심가에서도 상업적 간판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서로 흔드는 손길 너머 햇살 너머로 여기저기서 간판 대신 붉은 구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혼부부들을 만났다. 수줍은듯 자리를 피했다.

  '70년대 중반, 내가 시 쓰기를 그만두고 줄창 술만 마실 무렵, '표어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가 버린 일이 있다. 전주에서 목포까지 버스로 가는 동안에 차창에 스치는 반공표어들을 편집 없이 차례로 모아 놓은 글이었다.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에서부터 시작되어 띄어쓰기도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다닥다닥 이어 쓴, 두 페이지도 넘던 그 반공 표어들이, 북녘의 붉은 구호들을 보면서 새삼 떠올랐다.

  지금도 남녁의 어느 시골길에서는 그런 비슷한 반공 표어들이 섬뜩섬뜩 눈길을 끌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남과 북에서 다투어 자행되고 있는 야만이 어찌 그것뿐이랴. 그 붉은 구호들이 노리고 있는 우상화와 통제의 야만, 툭하면 빨강색을 뒤집어씌우는 남녘의 야만, 지역감정의 야만, 부패와 인신매매의 야만, 광복절에 성조기를 휘두르는 야만, 남북문제의 보호막을 찢어발긴 특검의 야만 등등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우리의 야만들이 흔드는 손길 너머 따가운 햇살 너머로 아득하게 슬프다.



우리를 환영해주던 호텔 직원들

    
우리가 묵었던 호텔 방
          
  호텔에 방을 배정받아 짐을 풀고 우리는 다시 조별로 버스에 탔다. 안내원 선생들이 버스마다 대여섯씩 동승했다. 그들은 버스가 움직이기 전에 몇 차례씩 우리의 머릿수를 헤아리곤 했다. 이동식 가두리 양식장, 4박 5일간의 이 희대의 야만에 사람들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2006-12-01 16:17:2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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