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로 간 빼먹는
유영국의 소설 『만월까지』(실천문학사)는 식민지시대 완주군 구이면 일대가 소설의 배경이 되어 있다. 식민지시대 소설에서 흔히 동원되는 민족의식이니 계급해방 같은 이념과는 거리가 먼, 먹거리에 매달려 입에 풀칠하기 바쁜, 짐승처럼 참담하게 사는 천민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그 뼈빠지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참담하고 아름답다. 저주받은 핏줄의 분노와 한과 파격적 사랑이 눈물범벅으로 비벼진 이야기다.
거기 보면 별똥죽이라는 음식이 나온다. 겨우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잎사귀째 잘라서 나물 섞어 죽을 쑨 청맥죽(靑麥粥)의 별칭이다. 봄철 내내 나물만 뜯어먹고 살다가 그나마 오랜만에 곡기가 느껴지는 죽을 들이키려니 눈에서 별똥이 떨어지듯 눈물이 쏟아지는 죽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물을 섞어 먹는다고 해서 옥루죽(玉淚粥)이라고도 한다.
지역축제마당의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깃발 앞에서 문득 그 별똥죽 생각이 난다. 별똥죽뿐이랴. 눈물 섞어 먹던 『만월까지』의 온갖 먹거리들이 깃발 주변에 꽂힌 허수아비들과 함께 줄줄이 떠오른다. 허수아비들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지푸라기로 간 내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남의 소중한 것을 힘 안 들이고 속임수로 빼앗으려드는 일에 빗댄 말이다. 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깃발이 바로 오랜 세월 농민들의 피땀을 울궈먹은 그 지푸라기다. '천하지대본'이라는 빛 좋은 허울을 자랑삼아서 수백 년을 두고 뼈빠지게 살아온 농민들만 마침내 뼈가 빠져버린 세상이다. 지푸라기로 간만 빼먹은 결과다. 허망하게 간을 빼앗긴 채 깃발 주변에 꽂혀 있는 허수아비들이 자꾸만 눈물겹다.
농번기가 되면, 논두렁에 앉아서 농민들과 함께 국수나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의 사진이 단골로 신문에 크로즈업되던 시절이 있었다. 거짓말인 줄 빤히 알면서도 예뻐보인다는 말을 즐기는 여인들처럼, 사진 찍고 나면 서둘러 자리를 뜨는 줄 빤히 알면서도 지푸라기로 간 빼먹는 그런 친농민적 제스추어를 감지덕지 여기는 착한(?) 농민들도 있었다.
농촌인구가 표나게 줄어든 요즘에는 북적거리는 시장통이나 전철역 같은 데를 돌아다니는 대통령 후보들의 서민행보가 바쁘다. 가히 '서민천하지대본'의 시절이다. 이번 대선은 마치 누가 서민인가를 판가름내려는 선거 같다. 점퍼차림의 그들은 수해현장에서 땀 한 방울 안 나는 삽질도 하고 시장통에서 흙 묻은 오이를 마구 씹어먹기도 한다. 간 빼앗길 허수아비들이 아직도 얼마나 더 남아 있는 건지, 그들의 점퍼차림이 꼭,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어떻게든 서둘러 간을 빼먹으려 드는 지푸라기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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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7 19:56:3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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