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 정치개혁, 재벌개혁 등등 요즘 빈번히 거론되는 것들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었으면 하는 이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들이 모두 강물 흐르듯, 강물 중에서도 거센 강물 흐르듯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가 너무 많은 게 요즘의 내 걱정이다. 그런 걱정 속에 그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걱정이 하나 잇다. 우리나라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다.
'50년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괴뢰집단이라고 했다. 북한괴뢰집단 혹은 북괴라 하지 않고 맨이름으로 그냥 북한이라고 하게 되면 마치 대단한 불온분자처럼 느껴지던 시대였다. 남조선 괴뢰도당이라 하지 않고 그냥 남조선이라고만 하는 소릴 어쩌다 듣게 되면 귀를 의심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 함석헌 같은 이는 서로 상대를 괴뢰집단이라고 우기는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남북 모두 괴뢰집단 아니냐면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양비론이긴 했지만 요즘 횡행하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양비론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남북이 서로 실체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유엔에도 가입하고 7.4 공동성명이나 6.15 공동선언이 있었던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조선에서는 대한민국(한국)을 한사코 '남조선'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조선)을 기필코 '북한'이라고 한다. 서로 상대방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일차적 의지로 느껴진다. 그것은 통일한국, 혹은 통일조선의 꿈이 완강하게 대립되어 있는 현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하는 호칭들이기도 하다. 서로 상대방을 조선이나 한국으로 불러주어야 통일이 빨리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나는가끔 해보곤 한다.
조선이든 한국이든 따지고 보면 사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름들은 아닌 것 같다. 조선은, 옛 이름을 내세워 물불 안 가리고 쿠데타의 필연성과 국가적 정통성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려던 이성계적 안간힘의 再版 같고, 한국은 또 조선조 말 단명했던 大韓帝國의 悲運과 그 초라함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마한 진한 변한을 아우르는 '大韓', 상해 임시정부로 옮아가 대한민국이 된 그 이름은 김구를 암살한 이승만에 의해서 또 얼마나 그나마 유지되던 국가적 정통성이 변질 왜곡되었던가.
애당초 大韓帝國은, 淸의 눈치를 보면서도 옛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왕조가 淸의 몰락이 확실해진 청일전쟁 이후 명나라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명분으로 급조한 이름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주장했던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명분상 실현된 셈인데, 청나라의 몰락이 예고된 상황에서 그야말로 식은 죽 먹듯 챙겨 본 허명이었다. 그런 식으로 굳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더라도 청나라는 이미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망할 나라의 마지막 불꽃놀이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어떤 사가들은 대한제국의 성립에 관하여 민비 시해사건이 그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 왕이나 왕비가 비정상적으로 죽었을 때 그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고 범인을 밝혀 처형한 뒤에 국상을 치르는 것이 정상적인 국상 절차였다고 한다.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2년이 넘도록 미루고 있었다. 장례식을 미루고 있는 동안, 왕비시해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범인을 색출하여 처형하기는커녕 일본에 의하여 가짜 범인들만 억울하게 처형되고 진범들은 일본 법정에서 무죄석방되는 일들이 태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와 국왕과 남편과 가장의 자존심이 그렇듯 참담하게 짓밟히는 상황 속에서 고종은 죽은 아내의 원혼을 달랠 길이 없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짓밟혀버린 그 자존심들을 되찾고 아내의 원혼을 달래어 국상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대한제국의 건립이었다. 처참하게 죽어 불에 타버린 왕비는 이런 곡절을 거쳐 시해당한지 3년만에 그 타다 남은 뼈조각 두어 개와 함께 대한제국의 황후로 매장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민비의 국상을 치르기 위한 명분으로 그처럼 급조된 국호였을지도 모르지만. 식민지시대의 항일투사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내걸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이름에 얽힌 일본에 대한 우리의 민족적 분노와 원한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저지른 원죄, 왕비시해라는 그 세기적 만행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새롭게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 김구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김구는 동아일보에 의해서 빨갱이로도 몰리고 국제 테러리스트로도 몰린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김성수는 한민당 당수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그의 친일 친미를 돕기 위한 김성수의 그러한 행보는 김구를 점점 더 빠져나오기 어려운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하여 삼팔선을 넘나들며 몸을 던지던 김구, 항일과 반외세의 독립국가를 이루려던 김구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단독정부를 수립해버린 이승만은 마침내 김구를 암살하고, 항일의지의 표상으로 김구가 내세웠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친미, 친일정권을 세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새 정치를 기대하고 있는 요즘, 나라 이름을 새삼 문제삼는 것은 그 동안 일본과 이승만과 김성수 등에 의해서 짓밟힌 대한민국의 꿈, 김구의 꿈을 다시 환기하고 싶어서다. 대한민국, 그 시작은 비록 원통하고 슬프고 초라했을지라도, 아직도 국가적 자존심이 외세에 의하여 수시로 짓밟히고 있을지라도, 지금의 민주당이 비록 한민당을 그 뿌리로 삼고 있을지라도 그 구겨진 자존심과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역사적 디딤돌이 되어주기를 새 정권에 기대한다. |
[2006-11-27 20:05:0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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