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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맞이 (2002. 4.17)
작성자 : 鄭洋 


지난 97년 대선 티비 토론에서 이인제 후보에게 사회자가 경선불복의 이유를 질문했을 때였다. 이인제후보는 미생 (장자의 도척편에 나오는 인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를 기다리다가 소낙비로 강물이 불어나자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다리 난간에 몸을 묶고 그대로 물에 잠겨 죽었다는 사람)의 얘기를 꺼내면서, 장자가 깨우쳐주는 바처럼, 하찮은 약속을 지키려고 목숨을 버리는,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노라고 으시딱딱 둘러대던 일이 생각난다.
  
  장자가 그의 '도척편'에서 도척의 입을 빌어 미생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것은 사실은 약속이나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태에 대한 야유였다. 아무리 하찮은 약속일지라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참뜻이었을 것이다. 도척이 누구인가? 당시 구천명의 악당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어지럽히던 악당, 요즘 말로는 조폭 왕초다.  미생을 어리석은 놈이라고 꾸짖는 것은 장자가 아니다. 사람의 간을 꺼내어 술안주로 씹으면서 공자에게 늘어놓던 도척의 궤변 중의 한 토막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조폭 왕초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하긴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약삭빠른 정치인들은 미생같은 이를, 본받아서는 절대로 안 될 어리석은 인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다리 난간에 몸을 묶고 죽었다는, 이인제후보나 도척 같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놈이라고 못박는 사람, 그 미생과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바보 노무현...

  그 바보의 바람이 방방곡곡에서 불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걸 스쳐가는 돌풍이라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한다. 정말 그런가? 내 느낌으로 그것은 잠깐 스쳐가는 게 절대로 아니다. 이 나라에 수백년 동안 준비되어왔던 바람이다. 그것은 탈권위 탈위선 탈부패의 바람, 탈음해 탈지역 탈분단 탈수구의 희망의 바람이다.

  고향친구처럼 다정다감한 사람, 박토에서 자란 무공해 알타리 무우 같이 맵고 순결한 사람, 서민들의 고통을 그 이마의 주름살로 깊게 새겨놓은 사람, 모성보호본능을 일깨우는 여리디 여린 인상의 그 노무현, 그러나 원칙과 진실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이익이라도 감수하면서 권위와 위선과 부패와 음해에 과감히 맞짱뜨는 사람, 이 나라에서 수백년 동안 고통스럽게 망서리던 그 탈수구의 바람이 비로소 아름다운 바보 노무현을 만난 것이다.

  권위와 위선과 부패와 음해에 찌든 이들에게 이 바람은 어쩌면 무서운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말라. 이 바람은 사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돌풍도 태풍도, 급진도 과격도 진보도 다 아니다. 권위와 위선과 부패와 음해에 찌든 부끄러운 땀방울들을 부드럽게 씻어줄 시원한 바람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그 시원한 바람의 중심에 서 있다.

[2006-11-27 19:44:1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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