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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와 원숭이 (2002.5.30)
작성자 : 鄭洋 


아카시아꽃이 시들고 산딸기가 익어가던 이맘때였다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끊일 날이 없던 초여름 어느날,
   전주동물원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우리를 벗어나
   동물원 뒤 왕릉 숲으로 흩어져 달아났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괜히 신이 났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고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싶었다. 이마에 열이 짚였다.
   학생들이야 데모를 하든 말든 그 답답하고 치욕스런 우리를 벗어나
   초여름의 숲속에 흩어져 한가롭게 산자락의 감자밭을 뒤적거리고
   산딸기나 시드는 아카시아꽃을 따먹고 있을
   그 원숭이들을 나는 꼭 보고 싶었다. 강의 없는 토요일쯤
   그 숲에 가보리라 맘먹으면서 종일토록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퇴근후 밥상머리에서 그 원숭이 얘기를 막 꺼내려는 참에
   뉴스를 들었다. 숲 속으로 달아났던 원숭이들이
   해가 저물면서 모두 제 우리로 돌아왔다는 뉴스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왠지 맥이 풀린 듯 들렸다. 나는 밥맛이 딱 떨어져
   밥상을 물리고 줄담배를 피워댔다.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줄담배쯤으로 해결될 슬픔이
   아닌 것만 같앗다. 아니, 슬픔인지 절망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억울함 같은 것인지, 줄담배 몇 대로는
   그 속이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앗다.

   그 날 그 원숭이들의 슬프고 억울한 귀소본능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 무슨 짓을 했는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다 어떻게 돌아왓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으면서도 멀쩡하게 집에 돌아와서 맞이하는
   술 깬 아침을 나는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누가 따먹지도 않는 산딸기
   빨갛게 혼자 익다 지쳐서 까맣게 질려 있는 산딸기
   고향길 산비탈에 저 혼자 익어가는 산딸기를 본다
   해 저물면 안면몰수하고 철망 안으로 돌아가던
   그날의 슬픈 원숭이들이 문득 떠오른다.
   제 손으로 따먹는 산딸기나 아카시아꽃보다도
   사료나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에
   더 익숙해져 있는 동물원의 원숭이들,  
   갇혀 살더라도 굶을 걱정이 없는 그들의 철망
   놀림을 당하더라도 안전이 보장되는 철망
  
   기껏 달아났다가도 해 저물면 그 철망이 그리운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선거철만 되면 안면몰수하고
   지역감정의 철망 안으로 어김없이 돌아가는,
   거기가 제 세상인 듯 날뛰는 원숭이들의 슬픈 귀소본능을
   고향길 산딸기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2006-11-27 19:47:0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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