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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하고 쓰라린 구두쇠 (2002.10.8)
작성자 : 鄭洋 


우리 민담 속의 구두쇠 얘기는 누가 더 구두쇠인가를 경쟁하는 해학담이 주를 이루고 있다. 민담 속에 단편적으로 출몰하는 그런 구두쇠 얘기가 천민자본에 대한 미움과 야유를 강화하여 보다 대형화 된 것이 놀부 얘기라면, 우리 근대소설에서 그 놀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대표적 인물이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직원이다.
  놀부는 삼강도 오륜도 모르는, "대장깐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작일" 만큼 독하고 모질고 싹아지 없기 때문에 누구든 마음놓고 미워하고 비난해도 좋은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나라도 이웃도, 인정도 체면도 다 등진 채 오로지 제 돈 아끼는 일에만 매달려 사는 윤직원의 희한한 구두쇠 행각들도 결코 놀부에 뒤지지 않는다. 말버릇도 비슷하다. 제 재산을 축내려드는 사람이 하인이든 아들이든 손자든, 남자라면 모두 '잡아 뽑을 놈', 며느리든 손주며느리든 딸이든 애인이든, 여자라면 모두 '짝 찢을 년'이라고 군시렁거리는 것이 윤직원의 묵은 입버릇이다.
  그는 일제가 수십만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보호해주고 거리거리에 순사(경찰)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이 유지되는 것으로 믿는, 일제치하를 의심없이 태평성대로 여기는 사람이다. 놀부의 파산을 즐기는 판소리 청중들처럼  태평천하의 독자들은  탐욕 때문에 몰락하는 윤직원을 통쾌히 여긴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맘 놓고 비난하고 미워하면서 그의 몰락까지도 누구 눈치 안 보고 즐긴다는 것은 통쾌한 일임에 틀림없다. 윤직원을 통해서 맛보는 그 통쾌함은 점점 두터워지는 천민자본주의의 그늘을 우리에게 두고두고 되새기게 한다. 윤직원이 일본을 고마운 나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미국을 고마운 나라로 여기는 한국인들이 많다. 참 쓰라린 일이다.    
  풍자를 통해서 식민지적 여건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그런 통쾌함과 쓰라림을 안겨주었던 채만식은 일제가 가장 껄끄러워 했던 작가였다. 그 채만식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요즘 문제삼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역시 쓰라린 일이다. 채만식은 그 수많은 친일문인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참회했던 사람이다.

[2006-11-27 19:53:5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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