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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17. 비 오는 날1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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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초의 성장통>17. 비 오는 날1

  1.

  필수에게서 편지가 왔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이 거무튀튀했던 놈. 주먹이 너무 세서 권투부 애들도, 우리들보다 두어 살 더 먹은 야구부 애들도 필수 앞에서는 말을 조심했다. 녀석은 우리 집에서 고구마 캘 때면 쫓아와서 쇠스랑질을 해댔고 나락 벨 때도 나보다 앞서서 일을 추렸다.

  농사지어본 적이 없는 진북동 놈이었는데도 논밭 일에 이력이 난 듯 쇠스랑질 낫질 괭이질이 몸에 붙었다. 중3때 반성문 잘못 썼다가 퇴학을 맞은 뒤 오거리 근처에서 껄렁거리던 놈이기도 했다.

  변솟간 뒤에서 수업료를 걸고 짤짤이 하다가 걸려서 15일 유기정학을 맞은 녀석은 아침에 반성문 한 장 쓴 뒤 운동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때 또 반성문 한 장 이렇게 써내야 하는 정학 생활을 닷새도 못 버텼다.

  “나는 영어 선생님이 싫다. 말할 때 너무 침이 튀고, 미국 갔다 온 자기 자랑을 너무 해대고, 크악 가래를 끌어올렸다가 우물우물 도로 삼키기 일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말을 한 시간에 스무 번도 더하고 ……”

  이렇게 시작된 그의 반성문은 공부 잘하는 몇몇만 보고 수업하시는 수학, 물상 선생님들 흉까지 잔뜩 보고 있었고 “오늘 아침 학생으로서 이런 내 마음을 반성한다.” 이렇게 마무리 되어 있곤 했다. 생활지도부 선생님이었던 조 뻐꺼지가 필수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몽둥이질을 하다가 지친 뻐꺼지가,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너는 내 몽둥이가 아깝다, 이 똥버러지 같은 새끼야!”

  필수는 의자를 쳐들어 뻐꺼지 책상 위에 깔린 유리를 박살내고 생활지도부실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그 뒤로 녀석은 오거리를 껄렁거렸다. 우리를 만나면 살갑게 대해줬다. 성인영화 티켓을 건네주기도 했다. 우린 학생이고 자신은 껄렁패에 불과한데도 4, 5년이 지나도록 그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녀석은 특히 군에서 휴가를 나온 친구에게 잘했다. 삼겹살과 소주에 맛들인 친구들은 휴가를 나왔을 때마다 필수에게 연락을 했고 녀석은 중학교 동창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데 고마워했다. 나는 삼수를 한 데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군대에 안 끌려갔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순번을 정한 듯 따로따로 휴가 나온 친구와 필수 틈에 끼어 공짜술 꽤나 얻어먹었던 것이었다.

  오늘 그 필수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순 전주 막말로 지렁이 기어가듯 찍찍 갈겨 쓴 편지는 내가 시詩를 쓴다는 것에 대한 경이감과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는 데서 시작되고 있었다.

  폭력 죄 짓고 교도소 몇 번 다녀온 뒤로 정신을 바짝 차렸다는, 지금은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녀석은 엉뚱하게도 김 양을 찾아달라는 데서 속력을 내고 있었다.

  “니가 서울서 생활헝게 아무래도 그런여자를 찾는디 수월헐거 아니것냐, 오팔팔이든 상봉동터미널이든 미아리텍사스든 천호동이든, 어쨌거나 대접받는답시고 그런디갈때도 있을팅게, 그런디 가먼 여자포주들을 눈여겨보란 말여. 너도 익히아는얼굴잉게 꼭한번 찾아봐라잉, 내가 만난 여자중 최고였응게.”

  이 대목까지 읽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데는 아예 없어졌거나 설령 있더라도 아직도 거기를 찾는 내 동료는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언제 때 여자를, 이젠 예순이 다 되었을 여자를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심상찮았다. 여기를 떠나기 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 그것이었다.

  떠난다. 아예 딴 나라로 이민을 가버린다? 아니면?

  나는 편지를 마저 읽기로 했다. 읽어 가면 갈수록 순 막말로 띄어쓰기 맞춤법을 물구나무 세워놨지만 편지를 그냥 쓴 게 아니라 깐에는 젖 먹던 힘까지 쏟은 것같이 보였다. 전주 시청 뒤 뚝너머(지금은 선미촌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다.)라고 불렸던 집창촌 골목골목이 어디 한 군데 허술한 데 없이 꿈틀꿈틀 살아나고 있었다.

  녀석이 김 양을 찾든지 말든지 내 불순한 상상력, 불순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편지 내용에 나는 빨려 들고 있었다. 글은 예상치도 못한 데서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했던가. 감춰진 욕망을 캐내는 힘도 가졌다고 했던가.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여기를 떠난다? 막말과 쌍말을 뒤섞어 내갈긴, 무려 15장이나 되는 편지를 책상 서랍에 묵힐 수는 없을 거라고 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45


[2019-05-08 18:45:3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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