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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13 책 짱뚱이시리즈3 오진희 지음, 신영식 그림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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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도서관>13. 책 '짱뚱이 시리즈' 3 / 오진희 지음, 신영식 그림

  옥분 여사


  동네 친구들은 스스럼없다. 간 밤 누구네 집 아버지가 술을 먹고 와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엄마를 두들겨 팼는지, 어떤 집 밥상이 뒤집어졌는지 죄다 알았다. 시집가기 전 연애질 하다 애가 생겨 양잿물 마시고 죽을 뻔했던 윗동네 언니 얘기, 이른 새벽 도살장에 팔려갈 때 돼지가 울부짖던 소리,간밤 이부자리에 오줌 누어 머리에 키를 쓰고 소금 얻으러 다닌 얘기 등등이 남부끄러울 새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떠다녔다.

  40여년 공백을 깨고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다짐을 했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회에 가지 말자고. 족히 4백 명이 넘는 동창들 중에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낯선 얼굴들이 많더라. 적응이 안 되더라. 특히 남자애들이 함부로 해대는 반말 짓거리며 어깨에 손 얹기, 쓰잘데기 없는 술 권하기 등 영 못쓰겠더라. 그냥 우리 동네 친구끼리 만나자. 오붓하니 얼마나 좋으냐. 이런 다짐을 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습들을 보니 너나없이 세월 앞에 당해낼 장사없구나 싶다. 엊그제 일은 금방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거기서 거기. 우리는 동병상련을 절실하게 경험하는 중이다. 밥집에서도 카페에서도 목소리들이 얼마나 큰지 접시가 몇 장은 깨졌을 거다. 남자애들은 모임에서 가끔 ‘빼고’ 만날 때도 있다. 재미없다는 거다. 뭣 하러 나와서 걸리적거리는지, 집에 있는 남자 한 명도 귀찮아 죽겠다며 와르르 웃어젖힌다. 여성스럽게 폼들 내고 나왔지만 손톱만큼도 여성스럽지 않다. 태초의 모습 같다.

  옥분 여사. 그녀는 홈쇼핑에서 속옷 광고를 보면 환장한다고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에 너무 사 쟁여서 서랍장에 속옷이 넘쳐난다고 했다. 1남 5녀 중 넷째인 그녀는 아침마다 속옷 때문에 전쟁을 치르곤 했단다. 아침잠이 많고 행동이 굼떴던 그녀. 한 달에 두어 번, 늦게 일어나거나 뜸부적 댄 날에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속옷을 꼭 짜서 입고 학교에 갔단다. 저녁에 빨아 넌 속옷이 마르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는데, 재바른 순서대로 속옷을 입고 학교에 가다 보니 그랬더란다. 그렇잖아도 추운 겨울, 이빨 딱딱 부딪히며 언니 동생들 원망하며 등굣길에 올랐을 옥분여사. 우리를 향해 속옷들 없으면 가져다 줄 테니 말씀만 하라신다.

   속옷이건 겉옷이건 나는 새 옷을 입어본 적이 거의 없다. 있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설 명절 전 엄마는 금산장에 가서 생강을 내다 팔고 구물구물한 자식들의 옷가지를 사오셨다. 요샛말로 배포 있게 한 방 쏜 것이다. 내 몫은 검보랏빛 나일론 바지였다. 얼마나 설레고 기분이 좋았는지 그 바지를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설날 당일에 입으라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어기고, 가끔 엄마 몰래 그 바지를 입고 방학숙제를 하거나 부엌일을 했다.

  엄마가 오시기 전 티 나지 않게 얼른 갈아입곤 하다가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나는 앞산에서 주워 온 솔방울과 검불로 불을 지펴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집안일과 논밭 일을 도와야만 했던 나는 늘 시간이 모자라, 가끔 하던 습관대로 그 땔감들을 아궁이 깊숙이 집어넣고 친구 집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있었다. 아마 소설책이었던 것 같은데 스토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가. 불이 아궁이 밖으로 나온 줄도 몰랐나 보다.

  정강이가 뜨끈하여 벌떡 일어난 나는 바지부터 쳐다보았다. 아랫부분은 이미 바싹 오그라붙어 있었고, 무릎은 튀어나와 아무리 손으로 잡아당겨 보아도 펴지질 않았다. 양푼에 물을 퍼와 바지에 묻혀 보기도 했다. 생각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활용하여 손쓸 수 있는 짓은 다 해 보았다. 하지만 바지는 여전히 복구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불길을 먹은 나일론 바지는 물을 먹을수록 더 딱딱해졌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엄마의 잔소리와 매질은 견딜 수 있겠다. 읽던 소설의 스토리를 다 잊어먹어도 아까울 것은 없다.그러나 나도 드디어 새 옷을 입었노라, 설 명절에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얼마나 자랑질하고 싶었던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부엌바닥에 철버덕 주저앉은 나는 아픈 속내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참을수록 더 펑펑펑 쏟아지던 눈물을 가까스로 훔치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내 체념하며 바지를 깊숙이 숨길 장소를 물색하고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야단 덜 맞을 방법을 모색했지 싶다.

  옥분 여사. 잠자코 얘기를 듣더니만 내 어깨를 탁 치며 말한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 가지고 사는 게 왜 그렇게 힘들었어 ~~”


  이현옥(우석대 도서관 사서)

  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94


[2019-05-08 18:54:4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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