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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17. 비 오는 날5 <끝>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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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초의 성장통>17. 비 오는 날 5<끝>

  5.

  필수의 얘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편지 내용으로 봐서 자신이 외로운 처지라거나 갈 곳이 없어서 그녀 생각이 났던 것은 아닐 터였다. 돈을 주고 그녀의 몸을 탐했고 휴가 나온 친구들을 그녀에게 들이밀었을지라도, 외상 거래의 뒷전에서 정이 싹튼 사이일망정 그녀를 만났던 그 시간만큼은 순정했을 것이었다.

  술에 취해서 노래방에 갔다가 벤치 밑에 처박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누구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토막토막 잘려 낙지발처럼 꿈틀거릴 때, 때마침 청소차가 자신을 실어갈 듯 딸랑딸랑 다가올 때 불현듯 그녀가 떠올랐던 것도 아닐 터였다. 거개는 아무 일도 없는데 창 밖에 연분홍 꽃잎처럼 문득 그녀가 떠올랐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필수 자신이 만난 사람들 수보다 더 많은 사내들이 그녀의 배 위를 지나갔겠지만, 필수 또한 한 마리 수컷으로 그녀의 배 위에 받쳐졌던 숫자에 불과하겠지만, 유난히 비가 잦았던 그 시절 녀석의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쓸어주었다던 여자.

  손님 없는 날이면 흰 손수건 깔고 재수패를 뗐다던 여자. 자신이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돈만 주면 다 네 것인 줄 아니? 젖가슴만은 절대로 안 된다.”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던, 감춰도 팔뚝으로 감춰도 다 가리지 못한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변솟간으로 내뺐다던 여자.

  필수의 슬픔이며 그리움이며 덜 떨어진 허풍끼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더운 숨소리를 열고 몸품 갚듯 녀석의 몸을 덥혀주었다는 여자.

  필수는 그녀의 뒷모습도 아팠을 것이었다. 김 양의 목소리며 얼굴 표정도 녀석에겐 상처였을 것이었다. 필수의 이런 마음을, 어려운 기색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녀석의 속마음을 환하게 꿰뚫어보았을 것이었다. 둘은 만났을 때마다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터였다.

  몸의 언어를 둘은 뜨겁게 터득해 갔을 터였다.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풀잎의 뒤를 조이듯 화르르르 서로의 몸에 감기는 불. 피차 몸속을 뛰쳐나갈 수 없어 지글지글 애간장이 타는 불. 서로의 눈동자 속에 박혀 이글거리는 불. 돈도 철학도 도덕도 명예도 그 무엇도 이들에겐 소용없었을 것이었다.

  그럴 듯한 말만 앞세우다 요모양 요꼴이 된 빌어먹을 세상을 패대기쳐버리듯 몸으로, 사람과 사람의 체온으로 타올라 뜨거워진 몸뚱이는 서로에게 하늘이었고 평등이었고 구원이었을 터였다.

  그러므로 필수는 김 양에게 제 외로움을 기대고 싶어서 찾는 게 아닐 것이었다. 성적 욕망을 해소할 대용품으로서 김 양을 찾았던 것도 아니라 단 한번만이라도 그녀를 사람답게 대접하고 싶어서 -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시 한번 뜨겁게 몸의 언어를 불사르고 싶어서 김 양을 찾았고 지금도 그 심정일 것이었다.

  제 외로움을 파먹고 살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으랴. 비에 젖은 제 머리칼을 거울에 비춰보며 자신의 자리를 쓰라리게 확인해 보지도 않은 그딴 것이 무슨 세월이랴.

  가슴 속에 꽁꽁 냉동 보관된 사연을 차마 못 펴보고 사는 게 비단 필수뿐이랴마는 녀석은 순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살갗의 겉에 새겨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참아야 할 때를 못 참고 터져버리는 재채기처럼 당혹스럽게 떠오르는 경우가 더 많지 않던가.

  지워지다 못해 문드러졌을 문양이 다시 살갗에 그려지는, 이미 조각조각 으스러진 토막들이 탱자냄새처럼 되엉겨 꿈틀거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기억 속의 순정에 마음을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녀석은 훤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필수가 이 땅을 떠날지 어딘가에서 김 양을 만날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이 만남의 여부는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이 만난다면 나이 그딴 것이 무슨 부담이 되랴. 둘이 만나서 삶의 야박한 숨통이 트일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아름다움만 되랴.

  그리움은 입으로 까먹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을 예사로 그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은사님께 배웠지만, 겁 많은 내 세월이 더 주저앉기 전에 나도 필수처럼 내 옛 여자의 이름을 맘 놓고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겠냐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 얇게 쌍꺼풀 진 반달눈을 떴다 감으며 새끼염소의 혀같이 말랑거리던 내 여자의 목소리가 비에 젖는다. 작은 새처럼 날갯죽지 푸드덕거리며 시간의 눈금을 지우고 싶던 내 옛 여자도 이 빗소리를 가만가만 뉘고 싶을지... 창 밖에 차박차박 봄비가 내린다. <끝>


  글쓴이 / 이병초 시인


  - 연재를 마치며

  저는 오랜 시간을 글줄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삶,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글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사람이나 삶의 해독이 어렵고 그것을 둘러싼 세계는 더더욱 알 길이 없습니다.

  글을 연재하는 내내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평범한 시간 속에 암시랑토 않게 감겨 있는 우리네 삶의 고결한 행위를 글줄로, 언어미학이라는 구실로 함부로 토막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함에도 제 글은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강찬구 전북포스트 발행인과 신현영 편집장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빠르게 문명화되는 현실을 대할 때마다 제 시詩와 산문은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돈보다도 사람이 먼저였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삶이 지금보다는 훨씬 풍요로웠다는 글줄 -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질수록 자유의 폭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글줄이 제 눈을 쓰라리게 했습니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정상화해 놓기 위해 간악한 무리와 싸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잇속으로 휘어져버리는 사람들에게 “너는 네 인생밖에 없냐!”라고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외롭게 살겠다는 각오가 왜소해지기 일쑤였다는 글줄을 읽으면서 목숨이 형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제 글줄은 사람이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다운 삶인지 세상이 어쩌자고 돈과 속도에 휘말려버렸는지를 제 글줄은 명쾌하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문학의 욕망과 현실의 욕망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힘이 부쳐 턱이 덜덜덜 떨려올 때면 제 흉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준 동료들이 가깝게 다가옵니다.

  그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제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글을 읽고 쓰고 고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동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제 시詩와 산문이 바람과 햇살과 시냇물소리를 닮기를 원합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그 정다움 속에서 제 동료들과, 이 땅의 불특정 다수인 동료들 삶의 행위가 아름답고 평등하게 빛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2019년 늦봄에...  이병초 올림.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54

[2019-05-15 18:10:5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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