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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한 언어에 비친 치열성의 미학
작성자 : 이병초 



  순정한 언어에 비친 치열성의 미학
                                           -오탁번 시집『알요강』을 읽고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누구나 쉽게 읽으라고 쓰는 게 시詩라는 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시들 중에는 어려운 시들이 꽤 많다. 문명적 색감을 짙게 드리운 자폐적 비문非文들이며 결핍과 소외와 외래어의 혼숙이다시피 한 시들은 삶의 질곡을 문 토막들조차 따로 놀기 일쑤였다. 이런 시편들이 내 편협한 독해력에 부담스러워질 이유는 없다. 시의 행간에 백태처럼 낀 흐린 정서 또한 시쓰기의 모색이자 전략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입맛이 씁쓸했다. 우리말로 쓴 시가 어렵더라는 자괴감 비슷한 감정은 불현듯 우리말과 정서가 반지하 습기 찬 구석에 버려진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런 생각에 힘이 부치고 있을 때 오탁번의 시집『알요강』을 만났다. 어디 한 군데 틀어짐 없이 반듯하고 소소한 삶의 결에 정답게 다가서되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알랑똥땅 넘어가지 않는 시편들은 예스럽고 친근하면서도 맵다. 일상의 모습을 걸림새 없이 써내려간 시의 어법이며 시 행간에 부싯깃처럼 반짝이는 유머감각은 우리 몸에 간직된 해학의 유전자 지도를 그려주듯 자연스럽다. 시의 혈을 짚어내는 데 탁월한 오태환의 언술에 기대어 말하면 1967년「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순 우리말을 채집 발굴해서 시를 쓴, 매서운 염결의 정신을 만났던 것이다.
  
  참나무 소나무 뽕나무
  나무마다 불땀도 냄새도 다 다르다
  불땀은 단연 참나무!
  냄새는 소나무!
  이글대는 참나무 알불은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소나무 뿌다구니 송진 타는 냄새는
  술보다 독하다
                               -「난로」, 부분

  이 시는 오탁번 시의 근황을 보여준다. 붓에 먹을 묻히자마자 죽죽 써내려간 듯한 이 시에는 침전된 자의식이나 겨울 정서의 깡마른 뒷갈피 이런 게 없다. 화자는 단지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작개비 형상에 불땀이란 시어가 맞물려지듯 불이 붙고 드디어 불꽃이 이글거린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오탁번의 시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지점에서부터 일렁이기 시작한다. 흔하디흔한 일상을 다따가 일으켜 세우듯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알불이라니. 뿌다구니에 박힌 채 타는 송진 냄새가 “술보다 독하다”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상이 돌연 팽팽하게 긴장된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혀를 대보고 싶고 술보다 독한 송진 타는 냄새에 취하고 싶은 화자의 욕망은 죽음의 의식에 가깝다.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했던가. 에로티즘과 죽음의 의식은 자웅동체라고도 했던가.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불길, 술보다 독한 송진 타는 냄새는 목숨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화자의 욕망을 이글거리게 한다. 이것이 최근의 어떤 시들보다도 배젊은, 팔순을 목전에 둔 오탁번 그의 시 근황이다.
  시집『알요강』을 읽은 이들이 나에게 말하곤 했다. 오탁번 선생님의 시는 재미있어서 좋다고. 한 자연인의 늙음 또는 늙어감을 유머감각으로 틔우는 솜씨에 반한 그들은 시인을 오탁번 어린이라고 명명하곤 했다. 나는 이런 말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의 시「지팡이」에서 “숲을 메운 적막”에 숨소리를 죽였다거나「그냥 가네」에서 “한 줌 흙과 만나는 적막이/ 통곡보다 아프다”라는 절창을 꺼내지 않더라도, 유머 감각이 빼어난 그의 시를 통하여 마음 밖으로 휘어진 시간들이 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오탁번 시의 유머감각은 그의 시 일면일 뿐이다. 거칠고 야박한 문명의 잣대와 저울로는 감내할 수 없는 유머감각일지언정 그것을 오탁번 시의 고갱이로 접근할 수는 없다. 더구나 순 우리말의 어법을 토대로 말의 맵시를 빛낸 시편들은 세간에서 거론되는 시의 융복합적 가역반응이랄지 시공을 넘나드는 생태계의 순환 가능성이라는 비평 어구에 닿지 않는다. 서양의 버터 냄새에 중독된 천편일률적 현대성이 다가오기 전에 그의 시에는- 문명세계는 물론 승속僧俗조차 떠난 듯 보이는 한국적 풍정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간밤에 비 오고 바람 불어
  새벽에 지팡이 짚고
  밤 주우러 나간다
  알밤은 다
  한발 빠른 다람쥐 차지
  나는 송이밤 몇 개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서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버마재비
  제 세상 만난다
  고추잠자리 떼
  혼자 어지럽다

  낮곁 내내
  보행기 미는 노인 한 둘
  텅 빈 동네
  벼 익는 논배미마다
  지는 해
  더디다
                             -「하루해」, 전문.

  언뜻 읽기에 이 시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예스럽고 소박하다. 간밤에 내린 비와 땅에 떨어진 송이밤,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 메뚜기 등속이 뛰고 고추잠자리 떼가 나는 풍경은 시골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시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단단해 보이는 내구력 때문일까. 일상을 빼다 박은 듯한 시어들이 눈에 익은 행으로 배열되고 정갈하게 연으로 나뉘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보다는 시의 행간에 비친 무욕의 시학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만추에 다가서는 일상을 습자지에 대고 베꼈거나 화자의 욕망을 시에 투사한 것이 아니라 인위성을 제거하고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정. 여기엔 삶의 무력감도 욕됨도 구차한 변명도 멋부림도 없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처럼 삶의 등속이 너나들이로 어우러져 가을 풍정이 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이 풍정을 곡진하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는 승속僧俗을 떠나버린 듯한 시의 울림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명과 거리를 둔 가을의 갈피를 순정하게 보여줌으로써 돈과 속도에 쫓기는 오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고요히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의 울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결코 특별하지 않고 잘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는- 낮곁, 지날결, 녈비, 간동하다, 볼꼴 좋다, 보시기, 하동하동, 쥐코밥상, 물만밥, 멧갓, 건들장마, 거먕빛 등의 순 우리말들이 조선인의 품성을 빼닮은 듯 점잖고 개구지고 살갑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 삶의 원형질을 간직했을 법한 이 말들은 부조리한 세계를 묵묵히 견디는 군상을 환기함과 동시에 새것의 강박에 시달리는 한국시의 오늘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의미는 실종되고 이미지만 조악하게 남은 일부 시들의 병적 징후가 끼어들 틈이 없고 기발함과 독창성에 포장된 문명적 무례함이나 낯선 일탈이 없다.
  눈이 밝은 독자는 여기서 언어를 공교히 다루는 시인의 치열성을 본다. 자본과 권력의 잉여물처럼 남은 차가운 거래 풍토를 모르쇠하고 붓을 벼려 죽간에 한 자씩 뜻을 새기듯 우리말의 알짜를 발굴해서 시의 피를 돌게 했을 그의 치열성은 시에 대한 매운 염결성과 상통한다. 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몇 번이고 국어사전을 펴보며 혼을 쥐어짜듯 시어를 고치고 다듬었을 오탁번 시인의 치열성은 시의 갱신을 절실하게 고민해보기는커녕 대중적 성감대에 초점을 맞춘 불감증의 시들을 부끄럽게 한다. 물화된 세상을 견디게 하는 시의 동력은 대중적 흡인력이나 단 1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소수 지식인의 당착적 언술에 있는 게 아니라 불행한 역사의 진실을 육화시킨 언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오탁번 시인이 우리말에 치열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곧잘 하는 말이다
  국민들이
  마음으로 근심한다고?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에라, 송이버섯 깔 놈들아!
                                 -「송이버섯」, 전문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대할 때 화자의 목소리는 격렬해진다. 시어의 음성적 자질까지 고려하면서 시를 썼다는 평가가 무색해질 정도다. 정치인들의 허세와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에 “에라, 송이버섯 깔 놈들아!”라고 질타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신년사」에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갑오왜란甲午倭亂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아관망명俄館亡命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황태연의 말에 동의하면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민비閔妃라 하고 조선朝鮮을 이조李朝라고 하는 놈들의 “혀를 잘라야 한다”고 일갈한다. 친일사학자 이병도를 일본의 고정간첩으로 대구 고검에 고소한(조선일보, 1972. 3. 1.) 영남의 한 의로운 선비를 시에 부각시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탁번 시의 역사의식을 만난다. 친일파 후손, 군부독재자, 재벌- 이들 권속에 제 잇속의 끈을 댄 기득권 세력의 참회가 없는 한 일반인의 삶과 한국시는 개별적 현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되게 앓고 있는 것이다.
  시의 위의威儀를 견고하게 세우듯 순 우리말을 간종그레 내보이는 오탁번의 시. 소소한 일상에 닿는 지저깨비며 막불겅이, 종종이를 야젓하게 껴안고 자신의 인생이 표리부동했다고 눈비음하지 않는 겸손의 시학은 그의 시가 노량으로 건들거리는 노객老客의 한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기계문명의 잔광에조차 간섭받음 없이 문명에 토막 난 시간까지를 넉넉히 품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안다. 한국시가 4차 산업의 강박에 시달릴지라도 오탁번의 시는 언어의 질감과 온도에 순응하는 우리말을 채집 발굴하여 시를 써냄과 동시에 뼈저리게 반성을 요구하는 역사의 질곡도 예리하게 파고들 것임을. 이숭원 교수가 그의 시「잘코사니!」를 해설하면서 “아파트 중앙난방의 얼빠진 안이함을 일시에 잘라내는 늙은 협객의 날렵한 도법이다.”라고 언급한 내용은 이 점을 튼실하게 뒷받침한다.
                                                       -월간『시인동네』, 2019년 7월호.

[2019-07-03 19:13:3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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