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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8 이규리- 길들여지지 않는 시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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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8. 길들여지지 않는 시
    
  

길들여지지 않는 시

  시인은 자신의 일상과 밀착된 것을 형상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함정은 시적 객관화의 실패로 이어지기 일쑤인데 시의 주된 대상이 자신의 몸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대담하고, “참 길고 질긴” 여성 얘기가 눈을 번쩍 띄게 한다. 시가 이처럼 대담하고 솔직할 수 있다는 데에 이견은 없을 듯하다.


와리바시와 사타구니 사이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

그런 구조가 있다

여학교 체육 선생은

다리벌리기 하는 아이들 등을 꾹꾹 눌러

나무젓가락 가르듯 해 기절시키곤 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간혹 젓가락이 반듯하게 나뉘질 않고

삐뚤어지거나 엇나가는 건

젓가락의 저항이다

말 못하는 다리의 저항이

삐끗 다른 길로 들게 했을까

와리바시란 이름 딱지 못 떼고

생을 마감하는 불운처럼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 이야기,

참 길고 질긴 이야기

                           -이규리, 「와라바시라는 이름」, 전문.



    


  이규리의 직관력이 서늘하다. 사물을 보자마자 그것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시인의 통찰력은 예리하다. 나무젓가락 즉 와리바시와 사타구니 사이에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는 진술은 직관력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여성 신체의 특수성을 시의 정면에 드러낸 문제의식은 단순한 피해의식을 지나 해방, 즉 완전 자유의 뜻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남성 중심 사회의 철폐를 원한다기보다 남성과 구별됨이 없는 한 인간의 독립과 자율을 더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남녀의 차별적 개념을 뿌리째 캐내고 싶은 인간 선언인 셈이다.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시의 욕망, 자신의 순결을 지켜내려는 치열성은 여성 앞을 가로막는 사회적 금기 앞에서 지금도도 정혈(精血)의 시간을 일구고 있다.      

  시(詩)는 타성에 젖은 관념이 아니다. 부당한 사회적 통념이나 금기와 싸워 이기고 싶은 욕망을 시는 저버리지 않는다. 법과 도덕과 관습이, 남성 우월주의가 사회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되레 사회의 건강한 욕망을 억압하는 장치가 아닌가를 반성해보는 자리가 시의 자리임을 모르는 독자는 없으리라.  



  이규리의 시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수단이자 목적으로 존재하는 이규리의 시는- 여자는 고분고분해야 돼로부터 맘충, 된장녀, 김치녀 등의 여성비하적 표현까지 딱 떼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다. 아니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 이야기”를 통해 남녀평등이라는 말도 깡그리 폐기하고 싶겠다.

  오늘을 견디는 삶이 얼마든지 삐뚤어지고 엇나갈지라도 길고도 질긴 불안이 어서 초겨울햇살처럼 맑아지길 기원한다.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73



[2019-11-28 21:48:1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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