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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대설大雪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치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먹고 있을
눈에 묻힌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인기척 없던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것 같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아무데나 들어서서 어디 한 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뉴욕일보』<시로 여는 세상>

  이 설경을 마주해보라. 흰 눈은 만감이 교차하는 정황을 안겨준다.
  눈속에 파묻힌 마을, 작은 창문들, 순한 눈빛들,
  며칠 그런 폭설에 갇히고픈 것이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그렇다. 세상의 동선을 차단하고 유배시키기도 한다.
  마음을 푸근히 여며주기도 하며, 한 장의 눈으로 덮어줌으로써,
  살아가는 일, 해후와 별리,
  세상의 소란한 모든 꿈들의 소음을 소거시킨다.
  그리하여 따스한 품속에
  상한 마음의 치유를 마련해주기도 하는 것,
  저 근원적 그리움으로 날을 세우는 사나운 눈발마저도
  때로 고요의 이름으로 품어준다.    신지혜<시인  


[2019-12-07 09:33:5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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