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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12. 정동철-노루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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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12. 노루 - 정동철





노루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지금쯤이면 함박눈이 펑펑펑 두세 번은 내렸어야 옳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싸락눈조차 내리지 않는다. 하늘의 일을 삐뚜루 바라보며 들먹일 계제가 나는 못 된다. 하지만 눈으로 온통 뒤덮인 눈부신 아침을 파먹듯 비스듬한 산자락에서 씨잉씽 비료푸대를 탔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새끼줄로 감발 치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산자락을 오르던 동무들. 녀석들도 넓어진 이마빡 쓸어 올리며 나처럼 함박눈을 기다리고 있을까.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데리고 노루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까지 들어온 날이 있었다 내 주먹만큼 큰 눈망울을 굴리며 기웃거리는 꼴을 식구들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중략) 집안으로 들어온 짐승 잡아먹으면 죄로 간다고 할머니는 처마 밑에 무청 시래기를 한 짐이나 내주셨다(중략) 눈이 쌓여서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저 지워져버린 밤 하던 일 작파한 채 내가 걸어왔던 길 되돌아보면 이빨 딱딱 부딪쳐가며 나, 겁도 없이 한 마리 노루가 되어 눈밭을 걸어온 것은 아닌가 싶은데 이러다가 내일 아침이면 눈 속에 집이 파묻혀버릴 것 같고 그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 눈 덮인 산길을 따라 노루 발자국을 쫒는 꿈을 꿀 것만 같다 노루 눈망울처럼 까만 한 점이 또 다른 까만 점을 쓸쓸히 따라 걷고 있는 참으로 쓸쓸한 풍경을 꿈속에서 보게 될 것 같다 그렇게 긴 긴 밤을 뒤척이다가보면 내 생각에도 노루 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거웃이 돋아날 것 같기도 한 밤이다

                                                             -정동철,「노루」부분


  함박눈 내리던 날 노루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왔다. 식구들은 이 손님을 보고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지면이 짧아서 생략했지만 마당에 들어온 이 손님은 이내 콧등을 들어 허공을 핥더니 “가느다란 목을 곧추세워 한숨처럼 콧김을 뱉으며 털썩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먹을 것이 궁한 시절이었어도 집안에 들어온 짐승은 잡아먹지 않았던 눈 내리는 날의 서정은 남북으로 동서로 갈려 꽁꽁 얼어붙은 조선팔도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할머니가 내준 무청 시래기를 먹고 다시 산으로 돌아간 노루. 그가 돌아가는 길에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뿌려줬을 "은 같고 금 같은 눈가루”며 등에 가볍게 앉은 그것을 “하얗게 체온으로 녹이”다가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을" 노루 한 마리. 그는 과거이자 현재인 까만 눈동자 한 점을 만난다. 시의 주체는 문득, 한 마리 소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억은 현재적 욕망으로 해석되지 않는 한 개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의 주체가 갖는 관심은 한 마리 노루에서 까만 눈동자로 집중되어 밤에 스미다가 “그렇게 긴긴 밤을 뒤척이다가보면 내 생각에도 노루 털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거웃이 돋아날 것 같기도”하다는 지점에 이른다. 추억을 환기하는 데 그치거나 토속적 유년이라는 언사에 갇히지 않고 “내가 누구인가?”를 골똘하게 파헤친다. 클릭, 액정, 나이키, 시즌오프, 조명탑 등등 문명의 강박 증세에 인박힌 비인칭적 존재들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을 표면화하는 것이다.

  기억 속에 남은 자신은 지워지지도 않고 파낼 수도 없다. 차디찬 실물거래의 풍토를 거절하지 못한 이 땅의 가난한 이력을 탓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기억 속의 자신을 꺼내어 따뜻하게, 부드럽게 살고 싶은 생의 무늬를 시에 포획하는 일이다. 원시 생명의 건강성이 훼손된 소외 한 마리를 미래로 몰고 갈 수는 없으니까.



  함박눈이 어서 펑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228
























[2019-12-26 20:25:3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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