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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작성자 : 이병초 


소리
이병초


  무슨 소리가 들려
  창틈에 바짝 대고 누가 종이를 천천히 찢는 소리 버들잎 옥새가 찍힌 밀서를 누설하듯 떠듬떠듬 창틈에 긁히는 소리 거미줄 수의나 해입은 여치의 빈소에 못 들어가고 나뭇가지를 느리게 비껴 치는 소리
  반편이라고 놀림 받았던 날들을 어금니로 꽉 깨물고 조문객 같은 제 목숨을 간신히 틔우는 소리
                                                                      -『미네르바』, 2019년 겨울호.


글씨(외 1편)
이병초


이슬에 젖어 바닥에 떨어진
판결문, 송 씨의 죄명과
징역 5년을 선고한다는 글씨가
쭈글쭈글하다

특경법 위반, 업무상 배임
직업안정법 위반 등의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농성천막에 가져와
수건으로 물기를 찍어낸다
밤새도록 이슬 먹느라고 애썼다
글씨는 죄가 없다
비리총장이 안 물러나도
임시이사 파견을 촉구하며
목이 쉬어도
글씨는 이게 무슨 뜻인지조차 모른다

젖은 짚 태우는 냄새가 문득
사무치도록 외롭다
송 씨와 악연을 끝내고 싶은 누군가
빈 하늘의 가슴을 빠개
쭈글쭈글해진 글씨를 말리는가보다


초짜


  차창 밖에 또 히끗히끗
  눈발이 날립니다
  팍 주저앉은 내 목을
  침 묻혀 찍어내던 날빛과
  내 몸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따로따로 밑줄 그었던 날들이
  히끗히끗 공중에 떠다닙니다

  길바닥에 돈 깔고 시간 깔고 다니면서 뭔 수로 끝을 보겠다는 것이냐 밑천까지 거덜내겠다는 심뽀냐 하는 말들이 머릿속에 고랑을 타고 쪼아댔지만 작신 밟힐 때 밟히더라도 끝끝내 질러버려야 할 끗수 때문에 차창 밖 산천은 철 따라 고왔습니다

  집이 어딘지 몰라서
  표도 못 끊고 히끗거리는 눈발이
  질러버려야 할 끗수처럼
  점점 더 굵어집니다
                                                               -『한국동서문학』, 2019년 겨울호.


빗방울소리(외 1편)
이병초

천막 지붕에 또옥똑
떨어지는 빗방울소리
귀가 맑게 트인다
비에 젖어 눈알 빛내는
떡갈잎들 거두며 가을은 깊다
운동장에 무작정 투신하는 빗방울처럼
목숨에 기댄 적 없어도
어머니의 가난과
농성천막을 물려받았으니
가을을 배웅해도 되겠다는 듯
내 오목가슴이 쫙 펴진다
강의 들어간 동료들 기다리며
또옥똑 귀가 트이는 빗방울소리
내 마음 한쪽에 쏠린다


통영


  바위에 부서져 수만 마리 음표로 튀는 파도소리를 생선 채반에 골고루 펴서 말리는 갯비린내가 몸에 저리다 쉼 없이 공중에 튀어 배기듯 음표를 찍어대도 박자가 삐는지 막썰이집 간판이 더 납작해진다
                                                                                     -『시인정신』, 2019년 겨울호.



이병초: 전주 출생. 1998년《詩眼》에 연작시「황방산의 달」당선, 시집으로『밤비』『살구꽃 피고』『까치독사』가 있으며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



[2020-01-08 10:17:3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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