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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14. 詩 - 송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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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14. 詩 - 송기원
이병초  |  jbpost2014@hanmail.net

    사진 = 김도기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
대학을 졸업하고도 공사판을 떠돌았다. 일용직 잡부였던 나는 신발이 변변치 않아서 발바닥에 못이 찔리기 일쑤였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각목 밖으로 삐져나온 못들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양발을 벗고 피 묻어나오는 발바닥을 성냥불로 지진 뒤 작은 망치나 빠루로 상처를 너댓 번 두들겨서 달랬다. 파상풍 치료를 끝낸 셈이었다.
못에 찔린 티내느라고 다리를 절뚝이며 철근패들이 흘린 쇳도막들을 마대자루에 주워 담다가 나는 행동을 멈추었다. 삽날에 찍힌 서리가 하얗게 반짝이기 때문이었다. 햐, 서리가 반짝이다니. 공사판 응달이라서 그럴까, 뭘까. 공사판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못에 찔린 발바닥도 잊어먹고 무작정 서 있었다. 귀에 몽당연필을 꽂은 반장이 너, 지금 뭣하는 거야! 고함을 쳐대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삽날에 찍힌 서리를 보면서 왜 마음이 맑아졌는지는 아직도 설명할 길이 없다.
 

    

별빛 하나에도 우리를 빛낼 수는 있다.
한 방울 눈물에도 우리를 씻을 수는 있다
버려진 정신들을 이끌고, 바람이 되어
한반도에 스민 잠을 흔들 수는 있다.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여.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
더 이상 詩를 써서 詩를 죽이지 말라.
누군가 엿보며 웃고 있도다. 웃고 있도다.
-송기원,「詩」, 전문
 
1988년 공사판을 떠돌던 때 이 시를 만났다. 목수패나 철근패, 콘크리트패에 섞일 수 없었던 날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이 시는 내 눈길을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별빛 한 점으로 “우리를 빛낼 수” 있다는 서정의 힘에 압도되어서가 아니다. 시에 적힌 “버려진 정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에 이르러 내 숨은 고르게 펴진다.
시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에 빠질 수는 있다. 삽날에 찍혀 반짝이는 서리를 보면서 마음이 맑아지듯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를 읽고 휘어졌던 마음이 펴졌다면 당신도 시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시구절의 뜻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시구절이 마음속으로 당장 쳐들어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구절이 가진 1차적 의미나 비유적 의미보다도 자기만의 정서적 결을 타면서 삶의 숨트임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의 공사판을 못 벗어난 채 뭉텅이로 빠져나간 세월이 아쉬운 당신. 시대의 질곡 또는 앙상한 언어미학적 굴레를 패대기치고 싶은 당신. 사람들이 거의 안 읽는 시를 도대체 왜 쓰느냐고 묻는 당신께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를 보낸다.  / 이병초(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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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7 21:54:3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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