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이병초의 '맑은 시비평'>17. 숭어 한 마리 - 김영춘
작성자 : 풀처럼 
파일1 : vnf333_1580349923_01.jpg (231.5 KB)
파일2 : vnf333_1580349923_02.jpg (38.2 KB)






<이병초의 '맑은 시비평'>17. 숭어 한 마리 - 김영춘


숭어 한 마리

  삶엔 기억이란 반추작용이 있다.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뛰어넘는 반추작용은 구심력까지 갖고 있어서 기억을 끌어당기고 놔주는 데 능수능란하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되새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반추작용은 삶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맡는다. 기억 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투영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계기가 기억을 현재의 시각에서 새롭게 직조하게 하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열 살 무렵 십리 길 심부름에서
  얻어 감춘 숭어 한 마리 있다
  바닷물이 거품을 물고 수문을 빠져나가는
  저수지의 한 중심
  염전 일꾼들의 좁혀오는 그물망을 뚫고
  허리를 휘어 허공으로 몸 날리던
  숭어 한 마리
  아스라한 수직의 높이에서
  순간의 호흡으로 빛나다가
  그물망 너머 물결 속으로 사라져갔다
  물결 속으로 사라지는 숭어를 보며
  나는 다리를 후들거렸다
  여시구렁 어두운 산길이 무서워
  후들거리던 때와는 달랐다
  무섬증과는 전혀 다른 후들거림을
  온 몸에 품게 한 숭어 한 마리
  내 가슴엔 아직도
  뙤악볕 아래 물결 속으로 사라지던
  그 후들거림이 산다

                        -김영춘, 「숭어 한 마리」, 전문




  시인의 열 살 때 기억을 떠올린 이 시엔 ‘후들거림’이 4번이나 나온다. “여시구렁 어두운 산길이 무서워/ 후들거리던 때와는 달랐다”라는 고백은 ‘후들거림’이 단순한 공포가 아님을 뜻한다. 느닷없이 들이닥쳤다가 눈 깜박할 새 사라져버렸을 숭어는 꼬마에게 어떤 신비로움을 가슴에 새겨놨을까. 왜 오늘 그 숭어가 떠올랐을까.

  공포와 전혀 다른 설렘을 맛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사회역사적 멍울을 오래 되새겨본 이에게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은 사람다움의 무늬를 가진다. 시인은 무슨 일인가를 하다가 자기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용솟음치는 순간에 숭어를 다시 만났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전율처럼 감기는 후들거림, 그 빛나는 순간은 개인과 집단의 한계를 맘껏 아우르는 높이에서 시인의 눈길을 빼앗았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일 수밖에 없는 슬픈 길항을 깨칠수록 갈증은 몸을 구박한다. 단 1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비루한 세상을 뛰어넘고 싶을수록 열 살 때의 후들거림은 생생하다. 사람을 잃고 좁은 땅에 건물을 높이 올릴수록 떼돈 번다는 자본의 탐욕, 문명의 저인망 그물에 맞서는 시인의 무기는 ‘후들거림’ 한 마리이다. 따라서 “염전 일꾼들의 좁혀오는 그물망을 뚫고/ 허리를 휘어 허공으로 몸 날리던” 숭어는 시인과 동일시된 상관물이다.

  사람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이유는 기억이란 오래된 미래를 품고 살기 때문이리라.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저작권자 © 전북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2020-01-30 11:05:23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