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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21. 김성철-그늘의 임대료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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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21. 그늘의 임대료- 김성철



그늘의 임대료

  가난과 실직과 실연, 소외 등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김성철 시의 상상력은 예술적 치열성에 목말라하는 청춘의 주소지를 보여준다. 삶이 선물한 피치 못할 사정들을 견디며 언어의 씨앗을 찾고 골라냈을 시의 가지런한 숨소리, 그의 첫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에 수록된 시편들 곳곳에 어리는 시의 눈물이 고맙다.

  독일인 노발리스가 “시詩는 일상의 삶에 대항하는 방벽이며 예감과 마술을 그 본질로 하는 시적 인간들이 관습의 세계에 맞서서 노래하는 저항이다.”라고 적었던 구절이 새삼 서늘하게 다가온다. 노발리스는 기존 시詩의 문제의식에 태고연하고 문명세계의 비루함에도 의연한, 김성철의 시 속에 간직된 현재성과 미래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쇠를 갈 때마다 그늘이 찾아왔다지요 우악스런 사내 손에 밀려 트이는 길은 스스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 보였죠 길의 골목은 두 줄 혹은 세 줄로 새겨지겠지만 집주인 따라 골목의 두께도 다르겠지만 두께야 무슨 상관있겠어요 상체 말아 어둠 틀어 안은 사내는 아랑곳없이 그늘을 쇳덩이에 새기고 있죠 쇳가루는 엄지 위에서 납작 엎드린 채 비늘 털고요

사내의 무딘 표정은 골목 끝이 보일 때쯤이나 볼 수 있을까요? 목련꽃보다 둥근 백열전구가 봉긋이 불 피우면 사내는 굽은 상체 곧게 펴고선 골목의 깊이를 가늠하죠 그리고 입 모아 후- 열쇠 그늘이 우르르 뛰어 내리겠죠 저 이가 품은 어둠의 질량은 얼마큼의 무게일지 나는 털려진 어둠 죄다 모아 사내의 밑천을 세어보고 싶네요

                                                    - 김성철,「그늘의 임대료」, 부분

  두 줄 혹은 세 줄로 열쇠의 길을 파가는 열쇠공 사내의 손끝 밑에 납작 엎드린, 쇳가루로 해체된 비늘의 잔상이 보인다. 열쇠를 복사하는 행위에 그늘이란 시어가 겹쳐지고 골목의 두께와 어둠의 질량이란 시구가 산문율에 맞물리면서 새 의미를 획득하는 이 시는 서정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현대시가 갖는 미덕은 지리멸렬 이어지는 진술이 아니라 느낌, 관찰, 변형을 토대로 운율과 이미지의 연속성 속에서 생성되는 형체임을 김성철의 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이 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단지 ‘그늘’의 임대료거나 골목풍경일 리 없다.

  수리공의 손끝에 밀려 트이는 길, 열쇠 길을 따라 새겨지는 골목의 두께와 깊이라니! 사내 품에 갇힌 우울증의 유전자 지도를 파가듯, 어둠의 질량을 가늠하듯 쇠의 비늘을 “입 모아 후- ” 불어내는 풍경의 안쪽은 낯설고도 친숙한 우리네 삶의 어떤 반짝임을 물고 있단 말인가. 일반 독자들이 산문시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 시는 맛있는 음식처럼 꼭꼭 씹어서 삼킬 것 같다.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838




[2020-02-27 14:28:3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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