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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22. 기형도-사랑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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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22. 사랑




사랑


왜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묻지 말자. 어떡하자고 아직껏 보고 싶은지 알려고도 하지 말자. 사랑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므로, 목숨을 거는 일이므로 이유가 필요치 않다. 무작정 그 사람에게 쏟았던 눈길, 무작정 더워지던 숨소리, 살갑던 손길이며, 잊어먹었는가 싶으면 되돌아와서 뼈에 사무치는 온기를 아쉬워하지 말자. 이별도 사랑이므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빈집」, 전문.

    


   시행마다 화자의 목소리가 이슬처럼 맺혀 있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짧은 밤’, ‘겨울 안개’, ‘촛불’, ‘흰 종이’, ‘눈물’ 등의 단어로 회한(悔恨)의 내면적 정경을 보여준다. ‘열망’이란 시어가 암시하듯 이 사랑도 뜨거웠던 듯하다. 사랑이 깊을수록 혼자 견뎌야하는 시간도 길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별의 대상은 사라지지 않고 화자의 내면에 옹이처럼 자리를 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똬리 튼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한 사람밖에 없다. 오직 그 사람만이 빈자리를 채울 수 있고 비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가 차지한 가슴 한쪽은 ‘빈집’이며, 화자는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 한 사람에게 목숨을 바치고 싶어도 당사자가 없는 상황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으로 쓸쓸히 다가온다. 화자는 평생, 스스로 잠근 빈집 주위를 서성거릴 터이다. 문을 잠그는 행위와 사랑이 빈집에 갇힌 상황은 “사랑을 간직하겠다.”는 동의어로 읽힌다.

  누구든 사랑을 하고 허기처럼 이별의 쓰린 맛을 보며 산다. 사랑의 품에 뛰어든 이별이란 상처를 아낀다.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두꺼워질수록 기억 속에 서린 감정은 나날이 새로워질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 사람과 관계없는 자신만의 맹목적인 그리움, 증발되지 않는 외로움에 기대어 오늘도 화자의 눈매는 깊어지리라. 이별 후에 다가온 열망적 회한의 뿌리는 다시 사랑이다.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936



[2020-03-04 15:35:06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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