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이병초 맑은시비평24. 서정주-무등을 보며
작성자 : 김경운 
파일1 : 1.png (425.5 KB)
파일2 : 1_2.png (493.0 KB)







<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24. 무등을 보며 - 서정주



  서정주의 시가 한국 근대시사(近代詩史)의 영욕(榮辱)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천재성이 유별나다고 평가받는 작품들로부터 친일시, 독재자들을 찬양한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충격으로 다가온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의 시 일부를 아끼는 편에 속한다. 한국적 삶을 토대로 차원 높게 성취한 언어미학을 그의 이력에 가두고 싶지 않았고 텍스트 밖의 곡절에 구애됨 없이 시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래의 시는 이런 내 생각을 여지없이 핍박한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서정주, 「무등을 보며」, 부분.





  단어와 단어가 만나서 언어의 결을 이루고 새 의미가 생성되는 미학이 이 시엔 없다.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뭔가를 가르치려는 투로 시상은 일관된다. 시의 울림이 없는 가르침은 편견에 불과하거나 자기 오만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에 적힌 것처럼 가난은 정말로 남루, 즉 누더기에 불과한가.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라는 캄캄한 굴종(屈從)이「무등을 보며」가 가르치고 싶은 뜻인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은 없다. 이 땅엔 아직도 가난을 벗어버리고 싶은 몸부림들이 더 많다. 그러함에도 살아갈수록 빚이 늘어 간다고들 한다. 그들이 왜 빚더미에 앉았는지를, 평생 뼈 빠지게 살았음에도 일반인은 빚에 갇힐 수밖에 없도록 사회구조가 짜인 것은 아닌지를 엄정히 살펴보지도 않고 “가난이 한낱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근천기에 쩔어버린 말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삶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차원 높은 언어미학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시의 형상화는 정비례하지 않으며 시는 더러 시인의 무의식이나 직관력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따지는 것은 시 또는 시인의 개별성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언어미학 이전의,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있다. 물질과 정신이 맞물려 있는 삶의 불가피성을 치열하게 접근하지 못한 데 있다.

  서정주 시 전체가 이런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힘주어 말하지만 가난은 한낱 누더기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가난은 몇몇 지식인의 입에 발린 수사(修辭)가 아니라 에미애비된 자가 죽음의 유혹, 자살의 유혹을 견디는 얼마나 무덥고 지루한 터널이던가.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30





[2020-03-18 18:00:06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