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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날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감각의 경험 /김태형
      -카니발, 인식하는 감각


<전략>


  호미씻이로 흥청망청한 술멕잇날
  우물 치고 풍장치고 윷 놀고
  막걸리 쏟아 부은 널벅지에
  불소주 섞어 훌렁훌렁 휘저으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아무나 와서
  한 바가지씩 퍼마시는 백중술
  풍장치다 윷 놀다 지나가다
  아무나 퍼마시다 에미애비도
  쥔어른도 부처님도 몰라보는 게
  백중날 머슴술이다

  김매기 끝낸 호미씻이를
  아무리 요란하게 해도
  이 세상 풀들을 끝끝내
  이겨먹을 수는 없다는 걸
  머슴들은 안다 어디 풀뿐이랴,
  계집도 세월도 아무리
  에미애비 몰라보게 퍼마셔도
  풀 말고도 이 세상에는
  이겨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리며 머슴들은
  한 바가지씩 어정칠월
  목숨의 세월의 끈을 축인다    

       -정양 「백중날」 전문(『현대시학』 4월호)

  정양의 「백중날」은 민속제의를 통해 규율적이고 억압적인 근대의 시간성을 넘어서서 ‘진정한 시간’을 창조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유쾌한 상대성의 감각은 “애비에미도 쥔어른도 부처님도 몰라보는”제멋대로 풀어 흩어진 비이성적 세계를 맞이한다. 백중은 흔히 망혼일(亡魂日)이라 하여 죽은 부모의 혼을 불러 제사를 지내는 속절俗節이기도 하지만, 겅상도에서는 바쁜 농번기를 지나 고된 농사의 시름을 풀고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하루를 즐기는 날이다.

  이날 호미씻이 풍속이 거행되는데, 가장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이 우스꽝스런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과 술을 얻어오는 놀이다. 호미씻이는 들판에서 잔치를 벌인다는 뜻으로 초연(草宴)이라고도 하고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일상의 엄격함과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위아래 격식 없이 해방되는 날이다. 경남 밀양의 백중놀이는 농신제를 지내며 풍물굿으로 흥을 돋우기도 하는데 이때 춤판은 양반춤을 추다 양반들을 몰아내고 머슴들의 익살스런 춤으로 절정에 이른다.

  지금은 이런 세시풍속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양의 「백중날」은 그저 지난 과거를 재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권위와 엄숙함, 금지와 제한의 기율을 넘나드는 머슴들의 장단 속에서 “이 세상 풀들을 끝끝내 이겨먹을 수 없다”는 인식에 닿아 있다. “어디 풀뿐이랴 계집도 세월도 아무리 애비에미 몰라보게 퍼마셔도 풀 말고도 이 세상에는 이겨먹을 게 아무 것도 없다”라는 파토스(pathos)에는 지배권력에 노동을 착취당한 이들의 통한이 서려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진 목숨에 한 바가지 술을 축이면서 규율과 권위로 강제하는 시간성을 벗어난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들의 인식이 자연과 여성과 시간을 지배의 대상으로 왜곡하지 않는 유기적 세계에 닿아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여성을 타자로 인식하고 지배해왔던 근대적 가치는 백중날이라는 해방된 시간 속에서 무화된다. 그래서 이들의 시간성은 변화와 재생의 초월적 세계를 열고 노동 소외와 파괴적인 현대의 지배 담론을 넘어서 감각을 통한 주체적 자유를 경험한다. 지난 세대의 문화자산으로 끝나지 않고 좋은 시를 통해 심미적 체험이 지금 이곳에 새롭게 살아 있다는 점은 시를 거듭 찾아 읽는 이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현대시』 5월호)

[2020-09-01 16:26:5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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