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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맑은시비평52. 김종해-바람 부는 날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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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52. 바람 부는 날- 김종해



바람 부는 날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사랑하던 이를 못 잊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 이유를 단 몇 줄로 요약할 수는 없다. 사랑은 애초부터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야박하게 빠르고 사람은 변한다던데 감정은 늙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랑이 닿지 않는 새벽이 쓰라릴수록 마음은 더 맑아지던가.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 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을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김종해, 「바람 부는 날」, 전문.



  바람이 부는 날, 시의 주인공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 간다. 당신을 만나려면 어떤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숨은 역”을 향해 직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외길에 작은 불빛이 보인다. 그런데 불빛의 보조관념인 ‘밀감’이 더 눈길을 끈다. 당신을 찾아가는 마음결이 불빛에 빗대어지는 순간 밀감의 색깔이 떠오름과 동시에 “외줄기 지하 통로” 같은 시상을 밝히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편도여행이라는 삶도 버거운데 당신을 향한 내 모든 행위가 외손뼉이라니. 삶에 폐기되다시피 한 짝사랑의 슬픈 음색이 시의 행간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밀감의 빛깔이 더 애틋한 걸까. 밀감은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당신과 나만의 “숨은 역”을 찾아줄 것 같다.

  왜 숨은 역일까. 둘만의 순정한 공간이겠지만, 사랑은 입으로 까먹는 감정의 잉여가 아니므로 둘만의 사연을 고이 간직하자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고, 내 사랑이 끝내 일방통행에 그칠지라도 그 속내를 꽁꽁 냉동 보관하는 것이 예의임을 숨은 역이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시의 현재가 애닲다. 당신을 만날 가능성보다 어둠을 파먹는 외길이 더 잘 보인다. 한 사람에게 목숨을 걸었어도 사랑은 철저히 개인 사정이란 데서 애달픔의 폭을 넓힌다는 사실도 너무 잘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간다.

  그리움에 빠졌든 눈이 멀었든 오늘도 철저히 혼자, 나는 밀감빛 순정을 타고 당신과 함께할 “숨은 역”으로 간다. 사랑에는 늦었다는 게 없다던가.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740












[2020-10-05 21:51:58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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