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가을햇살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 가을햇살


산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한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아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난 지가 언제인데도 염제의 기승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아침 저녁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한낮에는 여전히 삼십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에 우리의 기력은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다. 지난 여름의 혹서는 얼마나 끔찍했으며 때아닌 호우는 얼마나 광포했는가. 그럼에도 염제는 물러설 내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이제는 기강이변이 '이변'이 아니라 일상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시인은 노염 속에서도 가을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다. 모두가 짜증내는 늦더위의 강렬한 햇살에서 곡식과 과일이 알차게 여물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시인에게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번잡한 일상을 살다보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권능은 산과 들을 대할 때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그때 시인의 시야는 가없이 확대되고 후각과 촉각은 더할 수없이 예민해지며 마음 또한 무한정 너그러워진다. 자연 앞에 선 시인의 감각과 의식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처음으로 알몸이 된 숫처녀처럼 흥분과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밭두덕에 지천으로 자라는 바랭이풀이나, 두엄자리 옆 호박잎, 그리고 대숲의 댓잎이 예전과 다르게 정답게 느껴지고 그들의 수런거림이 다정한 연인의 속삭임같이 여겨지는 것도 시인의 감각과 의식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에 띄는 사물들은 새롭거나 신기할 게 아무것도 없는 잡초거나 호박잎, 먹감나무 따위의 농촌을 구성하는 일상적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인의 오관과 의식의 투망에 걸리면서 새로운 색깔과 향기를 발한다. 시인의 눈에 호박잎은 "누가 보든말든 /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갓난아이로 보이고, 얽히고 설킨 채 뒤엉켜 있는 칡넝쿨 또한 "너풀너풀 / 그 햇살을 뒤적거리는" 개구재이 소년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도시에서 아귀다툼하며 생존경쟁을 하는 인간과 달리 따가운 가을햇살을 사이좋게 나눠 받으며 속을 살찌운다. 그러면서 자신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에게 "연신 아는 체를" 하며 반겨주는 넉넉한 마음도 잊지 않는 것이다. 이 시의 미덕은 의태부사의 적절하고도 교묘한 활용에서 찾을 수 있다.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먹고 /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 (...) /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와 같은 구절의 의태부사가 창조해내는 시적 효과는 매우 정감적이고 따뜻하다. 특히"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눈부시게 반짝거려서/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을 감추고 있다/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에서처럼 '드문드문'이란 의태부사의 중첩과 반복, '햇감'과 '햇살' 등 유사한 음운의 반복을 통한 밝은 이미지의 창출, '도둑질'과 '도망'이 노리는 일종의 두운 효과 같은 것들은 이 시인의 탁월한 언어감각을 증명해주는 훌륭한 보기들이다. 우리 시에서 의성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특별한 시적 효과를 거두거나, 유성음으로 운율의 효과를 거둔 적은 많아도 의태부사나 무성음을 이용한 사례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것은 의성어나 유성음보다 의태어나 무성음이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이 시인은 의태부사와 무성음의 파격적 반복을 통해 뜻밖의 효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냥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가만히 소리 내어 몇 번이고 읊조려야 한다. 그러면 눈부신 초가을의 햇살 속에서 짙푸르다 못해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감잎에 숨어 발갛게 익어가는 햇감의 수줍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 정경은 무더위에 쇠잔해진 우리의 기력을 되살리는 청량제가 되어 새로운 의욕으로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시인이 발견한 가을햇살 속에서 햇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조금씩 영글어가는 것 같다. ( 장영우 문학평론가  동국대 문창과 교수)


[2020-10-09 19:47:5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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