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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 타박타박4. 안수사의 불빛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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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수사(安峀寺)의 불빛 <이현옥의 타박타박>


밤이 두려웠다. 사흘 전에도 자다가 이부자리에 철버덕 오줌을 싸고 말았다. 그 다음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오늘쯤 다시 사단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불안이 엄습해 온다. 내일 아침 키를 쓰고 소금 얻으러 문밖을 나설 생각에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어머니의 부지깽이질이 온몸에 느껴져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불빛이 내 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마루의 나무기둥에 몸을 기대고 나는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다. 떨군 고개를 들어 하늘도 바라보고 울타리 너머 생강밭도 사립문 옆 흔들리는 오동나무도 쳐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지는 저 멀리 산봉우리들도 올려 보았다. 그때 그곳에 반짝이는 불빛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보자면 봉우리들 중 맨 왼쪽 끝자락 능선에서 반짝이는 불빛. 동쪽과 가까운 위치였다. 달이 떠오르거나 해가 뜨던 산마루보다 약간 왼쪽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했으나 주변이 어둠에 덮이기 시작하자 불빛은 선명해졌다.

달 없는 밤이라서 더 잘 보였나 보다. 넋을 놓고 불빛을 바라보다가 뭇짐승들 움직임 소리를 감지하고서야 나는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왔다. 흐릿한 등잔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풍에 흐느적거리는 그을음 냄새가 코끝에 훅 다가왔다.

늦은 밤에도 불빛은 반짝이고 있을까. 나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치락거렸다. 자꾸자꾸 깨어 구멍 난 창호지 틈으로 눈길을 보냈다. 불빛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꼬박 잠이 들었다.

번뜩 눈을 떠보니 동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대뜸 방문을 열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불빛은 없고 나무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낮 동안에는 나무의 형체를, 저녁 무렵에는 불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곳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 1주일가량을 어두워지기 전부터 마루 끝에 버티고 앉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처음 켜지는 불빛을 놓치고 말았다.

한눈을 팔기도 했거니와 어머니를 도우러 이리저리 오가야 했다. 나는 작았고 산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득하기 짝이 없었다. 차츰차츰 나는 그 나무와 불빛에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나는 그 산날맹이와 그 너머까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들도 나처럼 배가 고플까. 하지만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곳일 것 같았다.

논밭 일과는 먼먼 나라의 주인공들일 것이다. 얼굴은 새하얗고 나 같은 오줌싸개도 부황이 든 아이도 말갛게 웃으며 반길 것이다. 내 상상력은 새끼에 새끼를 거듭 쳤다. 찾아가고 싶었다. 훔쳐보고 싶었다.

특히 이부자리에 몽땅 지도를 그렸을 때, 풀무질하다가 옷을 바싹 꼬실라 먹었을 때, 시렁에 올려놓은 조청을 식구들 몰래 먹으려고 단지를 꺼내다가 달싹 깨뜨렸을 때, 어머니께서 객지로 보따리 장사를 가셔서 사나흘 돌아오지 않고 있을 때......

한마디로 내 인생이 막장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그 생각에 휩싸였다. 저곳에서는 오막살이 외딴 우리 집이 보일까. 나처럼 상심한 아이들도 보일까. 희미한 등잔불 아래 내 모습을, 우리 집을 지켜보고 있거든 제발 이 슬픔들을 데려가줘. 혼잣말을 할 때도 있었다.

달과 별들에게는 왠지 가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들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덩달아 움직이는 통에 친해지거나 범접할 여지가 없었다. 변화무쌍하여 다가갈 엄두가 생기질 않았다.

하지만 외딴 초가집 어느 문을 열고 나오더라도 볼 수 있는 나무와 해질 무렵에 켜져서 새벽녘 변소에 다녀올 때까지 밝혀 주던 불빛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만 크게 먹는다면, 그리고 동생이나 오빠들이 동행해 준다면 찾아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동생에게 먼저 말해 보았으나 무섭다고 저 먼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냐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작은 오빠는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앞이 캄캄한 날, 논밭 일에 기진맥진할 때마다 내 몸은 습관적으로 그 나무와 불빛을 향해 있었다. 제발 이 고통에서 꺼내 달라 간절히 빌었다. 그 불빛은 나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줬다. 그러나 내가 시내에 있는 기찻길 옆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그곳이 고산의 “안수사”라는 절이란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겁쟁이인 나는 밧줄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올라 부자지간쯤으로 보이는 잘생긴 늙은 느티나무를 만났다. 50여 년 전의 숙제를 35년 후에야 마치게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 집은 보이지 않았다. 파헤쳐진 논과 밭, 공장들 뒤로 보이는 희뿌연한 것이 서해바다라고 하였다.

오늘밤에도 “안수사”는 변함없이 불을 밝혀 놓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작은 절 전체에 불을 켜놓은 듯 더 밝아졌다. 느티나무도 몸집이 커졌다. 산봉우리들은 엎드리면 코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출처: 전북포스트 http://m.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360






  

[2021-03-16 19:04:2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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