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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 타박타박6-2 그리운 춤과 노래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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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그리운 춤과 노래 <이현옥의 타박타박>


친정어머니는 장구잽이


친정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 4년이 되어간다. 생전에 그분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셨다. 이승에서의 삶은 찬송가나 성경책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곡조마냥 읊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숨과 시름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분의 강요에 못 이겨서, 동네 친구들과 휩쓸리느라고 교회에 다닌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는 그분을 보필하느라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이 돌아가시자 나는 자연스레 교회와 멀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내 몸 속에는 어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구절들 중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내 진정 사모하는」의 일부분)는 아직도 내 맘에 들어와 있다. 그분은 예수님을 친구처럼 남편처럼 의존하며 사셨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즈음이었다. 어머니께서 교회에 매달려 살기 전이었을 것이다. 한두 번 그분이 장구를 치며 신나게 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등짝이 벗겨질 만큼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 날은 논밭 일을 멈춘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떡과 전, 과일, 막걸리 등을 차려 놓고 실컷 놀며 쉬었다. 아마 ‘백중’날이지 않았나 싶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먹고 마시는 등 잔칫날과 진배없었다.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은 춤도 추고 풍물을 치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동네에 장구잽이만 해도 서너 명쯤 되었다. 내 어머니는 맨 앞에서 그네들을 이끌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끈으로 깡똥하니 묶고, 요리조리 장구를 치던 모습은 정말 멋졌다. 내가 우쭐해질 정도였다.

언젠가 카카오 단톡방에서 동네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는데 ‘성애’라는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가 장구 치며 노래할 때 창피했다고 한다. 숨어서 아버지를 힐끗거리다가 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소 거간꾼이셨던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술로 탕진했다는 얘기를 나도 가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성애는 그런 아버지가 술에 취해 노는 모습이 싫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신이 났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먹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탓도 있고 그날은 끼니 걱정이 없는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밝은 기운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전주 효자동의 끄트머리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던 고모할머니는 잊을만하면 일 년에 두어 번 우리 집에 오셨다. 특히 겨울 농한기에는 며칠을 묵어가셨다. 그분도 내 어머니처럼 홀몸이었지만,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사는 분이셨다.

두세 번 그분의 자식들도 다녀가곤 했는데,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기도를 마칠 때 우리가 “아멘”을 하면 곧바로 그 오빠들은 “짜장멘”을 합창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킥킥 웃음을 참느라 혼쭐이 났다.

고모할머니는 곰방대에다 말린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고 불을 붙여 깊이 들이마셨던 연기를 우리 얼굴에 후욱 내뿜을 정도로 얄궂은 양반이었다. 밤에는 이부자리에 누워 노래를 알려 주셨다. 한 소절씩 따라 부르며 나와 동생은 대중가요에 입문하였다.

특히 「고향무정」이라는 가요는 그분이 즐겨 부르던 노래로 나와 동생이 음과 곡조가 한 곳도 틀리지 않을 때까지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셨다. 어머니는 호롱불 옆에서 혀를 끌끌 차거나 성경책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소리 내어 읽으셨다.

남해대교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라디오가 전해 주었다. 동양에서 최고로 긴 다리(현수교)를 구경 한 번 가보자고 여간 시끌시끌하지 않았다. 동네방네 관광 계(契)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도 품팔이를 하거나 생강을 팔아서 열심히 곗돈을 붓고 계셨다.

그 곗돈이 쌓여갈 무렵 어머니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이었던 것 같다. 그분은 줄곧 찬송가만을 불러 오셨다. 당신과 같은 처지의 동네 아줌마와 바느질을 하며 그네들과 함께 가끔 흥얼거리기도 했지만 단독으로 그런 류의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남해대교로 관광을 가기 전에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로 시작되는 「고향무정」의 가사를 우리에게 묻고 또 물으며 완벽하게 소화하셨다. 어머니가 과연 관광버스 속에서, 그 다리 밑에서 어떻게 놀고 오셨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늙어지면은 못 노나니/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라는 노래를 신나게 불렀을 수도 있겠다. 밤늦게 돌아오신 어머니의 목소리는 상당히 잠겨 있었다.

1970년 초반이 되자 동네 사람들 중 대부분은 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그 놀이판 풍경들은 점차 사라졌다. 동백기름 발라 쪽진 머리들도, 무명 치마저고리도 볼 기회가 없어졌다. 우리 가락은 아침마다 틀어놓은 「새마을 노래」에 묻혀 버렸다.

시대적 배경을 보아하니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나 나의 양가 어머니나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 일본 어머니는 남편의 바람난 현장을 찾아갔다가,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문 바깥에서 엿듣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노래가 수록된 레코드를 사가지고 와 들으며 신세를 삭였을 테고, 내 시어머니는 춤바람 난 남편을 쫒아갔다가 아예 춤을 배워 버렸다.

일찌감치 홀몸이 된 친정어머니는 한때 장구잽이였다. 때때로 능동적이었을 그들의 끼와 놀이는 어디로들 사라졌을까. 가부장의 그늘에서 홀로된 역경 앞에서 시름에 빠져 살았을 어머니들이 두 눈에 밟힌다.

시어머니의 사교춤처럼, 친정어머니의 장구와 노래처럼, 일본 어머니의 엔카처럼, 흔들리고 흔들렸을 인생살이가 짠하다. 여름아, 부디 느릿느릿 오렴.


"오월 가정의 달을 무탈하게 보내셨는지... 가족이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꼭 보시기 바란다. 가족들 간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내가 뽑은 멋진 영화이다. 걸어도 걸어도 좁혀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들 간의 거리, 부부 간의 거리, 여러 관계들끼리의 거리, 그 간극을 최소화해 보자고 많은 시간을 헤매었다. 한몸이 되어보자고 연결하고 소통해 보자고, 허튼짓도 많이 했다. 이제야 나는 가족이란, 관계들이란 ‘어긋나다가 막을 내리는 공동체’가 아닐까? 내가 당도한 결론이다. 이것을 위해 긴 시간 걷고 걸었다. 돌고 또 돌아왔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전북포스트  jbpost2014@hanmail.net


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624





구름도 울고넘는 울고넘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있고 어부들 노래소리
멎은지 오래일세

[2021-05-25 00:46:1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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