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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의 타박타박8. 하지(夏至) 감자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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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하지(夏至) 감자 <이현옥의 타박타박>



요즘 나는 집안일이고, 바깥일이고 간에 꼼지락대기가 여간 싫은 게 아니다. 며칠 전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전화로 통보하셨다. 이번 주 토요일에 감자를 캔다는 것이다. 와서 도우라신다.

이럴 때 며느리인 내 입장은 껄끄럽기 짝이 없다. 불참하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지만 뒤끝이 불편할 것 같다. 마침 40살 넘은 친정조카가 서울에서 혼인을 한다고 했다. 거기나 냉큼 다녀와야겠다. 이참에 내 자식들도 만나고 와야겠다. 핑곗거리가 생겨서 다행이로다.

그런데 벌써 감자를 캘 때가 되었나? 하지가 되려면 요원하지 않은가? 뭐든지 참 빠른 세상이다. 눈코 틀 새 없이 돌아간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집안일을 도왔다. 청소와 빨래 정도는 기본이었다. 겨울이면 손과 발이 트거나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지만……. 논밭일도 감당할 만했다. 다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부엌일이었다.

겨울 농한기를 제외하면 저녁밥 짓기는 거의 내 차지였다.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때때로 돌확에다 불린 고추와 마늘 보리밥 두어 수저를 넣고 갈아서 열무김치도 버무렸다.

새로운 반찬을 만들 만한 건덕지가 없을 때 다시 말해 밥상 위에 올릴 것이 없으면 민망하고 염치가 없었다. 아침에 밥 위에 찐 된장이라도 먹다 남았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리밥과 우물 속에서 꺼낸 시어 꼬부라진 열무김치와 물 한 양푼, 고추장 종지가 덜렁 앉아 있는 날은 아주 끔찍했다. 겨우 이것밖에 없느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나의 노동 강도는 세어졌다. 더 이상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어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터득하게 된 일들도 생겼다. 아욱국 끓이는 법을 묻고 또 물어서 공책에 적었다가 그것을 들여다보며 국을 끓였고, 황석어젓에다 마늘, 파, 고추를 다져 넣고 밥 위에 올려 찌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연한 생강대(줄기와 잎)를 쫑쫑 썰어 이것저것 양념을 하여 쪄내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일꾼을 사서 논일을 할 때 그들에게 줄 샛거리나 밥을 내가야 하는 일은 보통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감자에 간갈치를 넣고 지지는 요리를 마스터했다. 역시 노트에 열심히 기록한 덕분이었다. 두어 번 실수를 하기는 했다.

하지 근방에 캔 감자는 푸근푸근하게 쉽사리 익어서 갈치를 넣고 자글자글 지지는 동안 몇 번 휘젓다 보면 곧잘 부서졌다. 곤죽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하지 전후에 감자로 요리를 할 경우에는 일단 도톰하게 썰어야 한다. 최소한만 뒤적거려야 한다.

이것을 알 턱이 없던 나는 간을 본다고, 양념 잘 섞이라고 네다섯 번 뒤집다가 사단을 내곤 했다. 어머니에게 혼쭐나지 않도록 나는 이 룰을 잘 지켰다.

모내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침에 학교가기 전 어머니는 당부를 하셨다. 빨리 돌아와서 밥하고, 하지 감자 지지고, 오뎅을 볶고, 우물에 담가 놓은 열무김치 꺼내고,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까지 잘 챙겨 논으로 가져 오라신다. 이 정도는 해본 남지기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생리를 시작했고 바야흐로 사춘기에 진입하였다 치더라도 무에 대수겠는가. 풍년이 들도록 모내기를 잘해야 쌀밥을 몇 입이라도 얻어먹지 않느냐 말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엄마가 시킨 대로 지지고 볶아서 함석다라이에 담았다. 수건으로 또아리를 만들어 머리에 괸 후 다라이를 그 위에 얹고, 한 손에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논으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얼굴과 등짝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논두렁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다 머리가 핑 돌았지만, 무사히 마친 일에 안도하며 긴 숨을 뱉었다. 정말이지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 감자 잘 지져왔다고 일꾼들로부터 칭찬을 들은 나는 한껏 고조되었다. 더군다나 돌아가는 길은 식은 죽 먹기 아니냔 말이다. 빈 주전자며 그릇들을 다라이에 몰아넣고 걸으면 발걸음은 한결 빨라질 터였다.

아주머니들한테 한 수저씩 밥을 받아먹어서 배도 웬만큼 든든해졌겠다, 입에서는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삭아서 늘어난 고무신이 벗겨질락말락 해도 낮 동안 달궈진 돌과 흙에 발바닥이 따끔거려도 견딜 만 했다.

곧 있으면 해도 뉘엿뉘엿 넘어갈 것이므로 누가 뭐래도 오늘은 나에게 100점을 매기고 싶었다.

아, 내 이러다가 사단이 날 줄 알았다. 신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의 콧노래를 기어이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걷기 사나운 논두렁을 벗어나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의 큰길에 들어선 지 한참이나 되었다. 양쪽 경사진 아래로는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나는 한들한들 가볍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거기 50m쯤 전방에 한 무더기의 남자애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같은 학년 애들 같았다.

검정 모자에 하얀 교복 차림이 영락없었다. 길은 딱 외길로 막다른 골목이나 마찬가지였다. 3, 4분 후면 곧 저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도랑을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얼기설기 담은 그릇들이 와장창 아우성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서 공을 차고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수비와 공격을 바꿔야겠다느니, 3반 누구는 뚬부적대다 한 박자 늦는다커니, 날을 따로 정해서 연습을 하자 커니, 도랑 가까이 머리를 쳐 박고 있는 내 등짝 따위는 상관없이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생리 혈이 교복을 검붉게 적셨던 그 어느 날처럼 그들이 눈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리며 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수치심 때문에 저린 오금은 펴지질 않았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글쓴이 이현옥 선생은 완주군 봉동에서 태어나 우석대 국문과와 전북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34년째 재직 중이며, 올해 12월 정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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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07









[2021-06-22 09:17:57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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