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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 타박타박13. 외갓집 사람들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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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외갓집 사람들 <이현옥의 타박타박>



외삼촌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3월 큰오빠 저승에 갔을 때에도 이번 추석에도 왔다 간 흔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부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던데 아예 갈라섰을까? 장성한 아들 둘이 취직 못했다고 움츠리고 계시나? 까짓 거 연락해 보면 될 텐데 나는 자꾸 뜸을 들이고 있다.

아니다.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큰오빠가 그리 되었을 때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남겼었는데 끝끝내 소식이 없지 않았나.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은 외숙모의 근심 가득하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그 외삼촌을 생각하면 코끝이 짠하다. 비쩍 마른데다 등은 휘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떠오른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폐병에 걸렸었다. 끼니때 가끔 우리와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허리가 꺾여 나갈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그의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수저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방금 목구멍으로 넘긴 보리밥과 호박대국이 스멀스멀 목젖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밥상머리를 떠나 우물가로 가서 한바탕 또 기침을 하였다. 입언저리를 닦고 머쓱한 표정으로 나타날 때에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가 우물가에서 미친 듯이 기침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먹다 남은 밥을 입에다 몰아넣었다. 되도록 그와 한상에서 밥을 먹지 않으려는 심보였으리라. 결국 그는 혼자서 밥을 먹었다. 몇 번이나 목을 꺽꺽대며 씹어 삼키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혀 있는 사람 같았다. 태생적인 슬픔이 온몸에 묻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딸 셋이 그 분 뱃속에서 나왔고 더 이상 자식은 생기지 않았다.

얼굴과 몸이 반듯했던 외할아버지는 명절이나 한겨울에 들어있는 당신 생신날을 제외하고는 장터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막걸리집에서 숙식을 한다고 들었다. 주모인 아주머니와 눈이 맞아 외할머니와는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어린 내 눈에 목격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외할머니 댁에 가는 길목에 있던 막걸리집, 미닫이문 열린 틈으로 입이 합죽하고 피부색이 불그죽죽한 아주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듀엣으로 부르던 모습이 내 눈에 띄곤 했다.

“아이고, 아버지~~ 누가 날더러 아버지라고 허여,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 아버지라니 누구여~~”로부터 <사철가>도 들었다.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더라.”라는 애절한 토막을 듣기도 했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는 장면도 보았다.

느릿느릿 장터를 벗어나 둥구나무 앞 ‘학다리’마을로 꺾어지는 길목에 다다를 때까지 그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 요상한 광경을 어른들에게 물어도 보고 또 일러바치고 싶었으나,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돌출된 외할머니 입은 대대 나와 있어서 내가 목격한 사실을 얘기한다면 큰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조심조심 이 얘기를 건네면 어머니는 한숨을 푹푹 내쉬셨다. 나의 궁금증은 이모들과 함께 한 이불 아래에서 자는 날 해소할 수 있었다. 큰 이모는 운주 싱그랭이로, 막내 이모는 이서로 시집을 가셨는데 가운데가 우리 어머니였다.

이모들은 추석 명절에는 친정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마도 농번기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추석 이튿날 해질녘에 오셔서 그날 밤은 외할머니 댁에서, 다음날은 우리 집에서 하룻밤씩 묵고 가셨다. 농한기 설에는 4~5일 정도 묵으시기도 했다.

그 분들은 모였다 하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속닥거렸다. 초저녁에도, 한숨 자고 일어난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연신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자다 깨다 비몽사몽 중에 그 분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이모들 초미의 관심사는 외할아버지가 낳은 자식들을 외할머니께 떠넘기고 도망간 막걸리집 아주머니의 행방이었다.

입 밖에 꺼내면 안 될 얘기도 구분하지 못한 채 나는 작은오빠와 동생에게 그분들이 하던 것처럼 속닥속닥 전해 주었다. 작은오빠는 놀란 표정으로 이모들에게서 들은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였다. 당연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아버지는 그 아주머니에게서 자식 셋을 보았다.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이 그들이다. 내가 서두에서 꺼낸 폐병에 걸린 삼촌이 바로 그 분이 낳은 큰아들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아주머니는 어린 삼촌들과 이모를 버리고 어느 신새벽에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 그 이모와 삼촌들을 건사하신 분은 내 외할머니셨다.

고생고생을 하다가 어린 나이에 시집갔던 배다른 이모는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막내 삼촌은 나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이 오묘한 가족들을 나는 은근히 차별했던 것 같다. 저절로 경계하게 되었다. 아마 외할머니의 눈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경계도 흐지부지 되었고, 측은지심과 연민,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내 몸속에서 자라면서 사람에 대한 도리를 작정이라도 한 듯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큰오빠가 세상을 떴을 때 우리는 최소한의 일가친척들에게만 연락을 취했다. 내 어머니를 “누님 누님” 부르며 마치 당신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외삼촌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파주에서 우체국 집배원으로 퇴직을 하고 어느 아파트 경비로 재취업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있다.

지난번 장례식장에서 만난 작은삼촌의 낯꽃은 그나마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기막힌 인생들을 살았다. 어느 곳에 발을 딛고 있든지 간에 안녕을 기원한다.

그렇지 않아도 소원한 나의 가족들은 어머니와 큰오빠가 죽은 후에는 거의 모이지 않는다. 그 분들의 그늘이, 구심점이 사라진 탓인가. 하여 명절 끝이 이렇듯 스산한 모양이다. 오늘은 모처럼 임방울 명창의 단가 <명기명창>을 찾아서 한 판 들어야겠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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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991








[2021-09-29 10:05:57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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