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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옥 타박타박14-2. 운주 화암사
작성자 : 김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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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운주 화암사 <이현옥의 타박타박>


싱그랭이 요동마을

화암사 가는 길목에 있는 ‘싱그랭이 요동마을’은 내게 항상 정답다. 큰이모가 70여 년 세월을 그 마을에 사셨기에 그럴 것이다. 거기 수령이 오래된 나무에 들르면 큰이모네 소식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이런 잔머리 쯤 굴릴 줄 아는 인간이다. 성질 급한 남편을 만나서 살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큰이모는 ‘싱그랭이 요동마을’로 시집을 갔다. 찬찬히 계산해 보니까 그 분 연세가 거의 100세에 가깝다. 큰이모는 현재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다 늙은 장남에게 집과 터를 남기고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건너 건너서 들었다. 의료시설이 좋은, 서울에 사는 다른 자식들 곁으로 가신 것이다.

내 자식들이 어렸을 때 나는 가끔 ‘싱그랭이’에 가야 했다(‘요동마을’을 뺀 이유는 ‘싱그랭이’라는 어감을 좋아해서다.). 우리는 줄곧 “싱그랭이 이모, 싱그랭이 오빠”라고 그들을 퉁 치듯 불러왔다.

입안에서 살살 구르는 싱그랭이라는 말이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지명 사전은 따로 찾아 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왈가왈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500년 가까이 되었다는 노거수 옆 안내판에는 ‘싱그랭이’보다 ‘요동마을’을 부각시켜 놓은 듯했다.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일단 글씨 크기에서 차이가 느껴졌다(사진 참조)

어머니는 내 자식들과 함께 일 년에 한두 번 ‘싱그랭이’에 가 계셨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실어 날라야만 했다. 마을 앞개울은 깨끗했고 그 개울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크고 싱그러웠다. 큰이모 집은 길가 집들 담장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야 나타난다.

사업을 크게 하던 오빠들은 당신들 어머니가 말년에 살기 편하도록 묵은 집을 허물고 커다란 한옥을 앉혔다. 비록 대청마루는 없었지만 별채에다 찜질방까지 작심하고 지었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내가 그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연로하신 이모는 내 아들이 어질러놓은 거실 마루를 걸레로 훔치고 계셨다. 내가 얼른 걸레를 빼앗아 들자 이모는 선한 웃음을 지으며 내가 걸레를 들게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저 굵고 널찍널찍한 노란빛깔의 나무들이 자연스런 때깔이 나오려면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문턱이 높아서 이모께는 좀 불편하겠다. 순간 쓰잘데없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마당에 자갈을 깔고 다듬느라고 몇몇 과실수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큰이모와 내 어머니는 얼굴과 덩치가 비슷하여 두 분이 함께 메주를 쑨다거나 김장할 때 헷갈리고는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절구통에 메주콩을 빻고 있는 분이 엄마인 줄 알고 놀래주려다가 낭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졌었던지 나보다 더 놀란 큰이모는 곧 입을 가리고 소리 내어 웃으셨는데, 목소리나 행동거지가 맑고 선해서 상대방의 민망함을 가려주곤 했었다. 나무라는 법이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큰이모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것 말고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면 추석 명절에 가져 오실 덜 익은 감과 풋대추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있었다.

감나무는 서쪽으로 난 샛문 밖에, 대추나무는 우물가 옆 울타리 사이에 끼어 옹색하게 자라고 있었다. 감나무는 몸집이 꽤 커서 돼지가 집을 나갔던 날 거기에 목을 매달도록 작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열두어 살 적 일이었다. 내 인생 최초로 죽음을 상상하게 만들었던 그 사건을 글로 발표했더니, 누군가가 그 글을 읽고 나에게 훈수를 두었다. 감나무는 약해서 쉬 부러진다고, 50년가량 지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그때 나쁜 맘먹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반대로 대추나무는 내 키보다 커서 꼭대기에 달린 대추를 따려면 발뒤꿈치를 번쩍 들거나 그도 안 될 때에는 작대기가 필요했다. 작대기로 휘어진 대추가지를 끌어당겨야 딸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겨우 두 그루의 과실수로 햇곡식 거두기 전의 가을을 견뎠다. 붉은 기운이 막 돌기 시작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입에서는 침이 고이고 뱃속은 연신 꼬르륵거렸다.

우리 집과는 다르게 큰이모네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집 안팎과 야산에 널려 있었다. 특히 대추나무가 더 많았는데 그해 대추농사가 잘 되면 운이 좋은 자식은 시내 고등학교에, 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과일이고 곡식이고 간에 해갈이가 심해서 풍흉의 영향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자식을 자그마치 열둘이나 두었던 탓에 그들 모두를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 많은 양의 감과 대추를 가져오셨던 것이다. 떫은 감은 우려서, 대추는 말려서 약재로 쓸 틈도 없이 우리들은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추석 전이거나 혹은 후에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회가 추석 지난 후에 열리면 우리는 감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큰이모가 가져 온 주먹만 한 땡감 때문이었다. 추석 전에 운동회가 열리게 되면 어머니는 한 그루 밖에 없는 감나무에서 자잘한 감을 따서 우려 주셨다.

어머니는 항아리 속에다 떫은 감을 차곡차곡 넣고 따뜻한 소금물을 부어 이불로 꽁꽁 싸매고 군용담요로 덮어 두셨다. 아랫목 옆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루는 참을 만 했다. 이틀째 우리는 기어이 담요를 들쳐 내고 항아리 뚜껑을 열고 말았다. 시구름한 냄새와 함께 약간의 기포가 생긴 것도 같았다.

우리는 감을 꺼내서 돌아가며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떫은맛이 없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우리가 한 짓이 들통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불을 싸매고 덮었다. 저녁 내내 근심이 태산 같았다. 과연 감이 잘 우려질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운동회 날 아침 감을 꺼내 맛을 보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쏘아보았다. 분명히 뚜껑을 열어본 것이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감이 저렇게 미칠 리가 없다며 화살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듬더듬 변명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저을 뿐이었다.

지금 남편과 나는 싱그랭이 마을 노거수 옆 정자에 앉아서 여름 소나기와 공기 돌만한 우박을 피하고 있다. 그 많던 대추와 감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저 가운데 돌담 사이로 들어가면 큰 이모 집이 나올 것이다. 제법 손때 묻어 고와졌을 그 한옥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 그 집 앞이라도 더듬더듬 지나쳐 볼까. 이런저런 생각들조차 나는 입 밖에 내놓지 않았다. 혼자 왔을 때 꼭 들러 보겠다고 말이다.

추석이 지난 가을 초입 드디어 나는 홀가분하게 화암사를 다녀왔다. 길 양쪽에 주황빛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제 나는 침을 꼴깍 삼키지도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감은 관상용일 뿐 식용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차를 천천히 몰다가 멈추다가 기웃기웃 가을 빛깔을 바라보자니 오랜만에 떫은맛이 살아난다. 따뜻한 소금물에 우려낸 감이 굴뚝같이 먹고 싶어졌다.

나는 기어이 큰이모 집을 향해 핸들을 꺾고 말았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많던 감나무와 대추나무는 보이질 않고 별채 뒤꽁무니와 본채 지붕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나는 차속에 멍하니 앉아서 큰이모를 생각했다. 정신은 온전하신가. 선한 웃음은 여전하신가.

한옥 지붕에 야산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우두커니 갇혀서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을 ‘싱그랭이 오빠들’의 소식을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했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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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00








[2021-11-09 09:45:5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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