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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기억 속을 - 이병초
작성자 : 김경운 


동트는 기억 속을(외 4편)

                               이병초



 흘겨만 봐도
 시들어버릴 것 같은 꽃송이는
 밤새 뭔가를 쓴 종이쪽을 뒤로 감췄는지
 동진강 잔물살을
 눈썹에 매달았습니다
 회 포대 종이로 땜질한 어둠을 찍어 밤새도록 쓴 편지, 글씨 한 줄도 못 읽고 강물에 동동동 떠가는 지- 동트는 기억 속을 알몸으로 빠져나갑니다
 편지가 알몸으로 빠져나간 자리에
 눈알 찌르는 이름을
 뉘고 싶어서
 꽃송이는
 풀에 씻긴 맨종아리가 쓰라립니다






늑실거리며



독감이든 코로나19가 침투했든 말든
아플 테면 어디 아파보라고
골방문 딱 닫아걸고
꼬박 이레를 늑실거렸다
병원에 가봤냐고, 왜 약을 안 먹냐고 따지는
말들 완전 쌩까고 으득으득
늑실거릴 수 있다는 게
얼마 만이냐, 내 여자에게
성한 수컷으로 불퉁거릴 시간이
돌아온 것이냐, 뻣뻣한 뒷목을  
목침에 대고 쭈욱쭉 문지르며  
무슨 죄를 짓고 싶어서 마음이 이리 설레는지
콧물이 줄줄 흘렀다
온갖 뼈마디가 쑤시고 저렸다

때가 되어 내 몸에 삼베옷 입히고
동전 한 닢 물리는지
밤낮을 안 가리고 잠이 쏟아졌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속옷을 벗으며
몹쓸 병 걸린 이 세상을
끝내 못 버릴 것 같아서
눈물이 와락 쏟아지기도 했다




풀 뽑기



팔순 엄니 메주콩밭에 가서
풀을 뽑는다 가뭄 타느라고
땅바닥에 억세게 박힌
바랭이풀 호미로 찍는다
이렇게 뿌리까지 모질게 캐내지 않으면
새카맣게 또 살아날 바랭이풀
이 악물고 족친다

땅이야 죽든 말든 독한 농약으로
밭두렁째 지져버려야
종자값이라도 건질 거라고
푸드득 달아나는 까투리가
저만치 아는 체를 하거나 말거나
내 얼굴에 흙이 튀어 배기거나 말거나
죽자사자 풀들이 돋아난다
  
풀 말고도 뽑아버려야 할 것들이
이  세상에는 꼭 있는 것 같다





몸갚음하듯



잠을 깬 기척에
물 한 모금 건네고
그녀의 목 뒤며
등뼈 마디마디를 짚어갑니다
창틈으로 새는 날빛을
혀로 감아 곰곰이 되돌려주듯
심장 박동 소리를 찍어누르고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허리 근육을
몸갚음하듯 짚어갑니다

어디가 아픈지 시원한지  
마른 등을 바르르 떨며
숨을 딱 멈추고
파다닥 튀어 오르려는 몸!
등을 세우며 손차양하느라
겨드랑이를 들킵니다
그녀 눈가에 적힌 티끌을
혀로 찍어내고 싶은
내 마음도 들킵니다
더는 살 빠지기 싫다는
얇게 쌍꺼풀진 반달눈 속에서 나를 꺼내어
버들잎 같은 발을 주무릅니다
가지런해진 숨소리를 따라갑니다





가을비 통신


합정역 7번 출구 옆에 있는
편의점 간판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그냥 비를 맞으며 걷는다

나를 기다리거나
그동안 못 만난 사람들에게
“ 어깨에 또옥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내 목숨이
  또옥똑 새는 것 같다”라고
문자를 보내면, 누구 한 명쯤은
꼴값한다고 되받아치리라
젖지 않고 젖을 수 있거나
그리지 않은 그림을 보여줄 재주는 없어도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누군가 짜놓은 내 시간표
그것이 가격표였음은 알았다고
점점 굵어지는 빗소리
옥수숫대처럼 쫄딱 젖은 빗소리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맘 놓고 길을 잃어보지 못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1초도 보태지 못했어도
몸속의 피가 마르는지
누가 보고 싶은지
빗소리에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시작 노트>

못다 핀 꽃 한 송이



  1984년 가을. 무교동 어떤 캬바레 근처 포장마차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그녀는 내게 다짜고짜 소주를 권했다. 처음 본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얻어터졌는지 화장기 벗겨진 눈두덩이 시퍼랬다. 자신을  ‘카수’라고 소개한 그녀는 반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출연료를 뜯기기 일쑤인 데다 업주에게 멸시당하다 못해 개같이 두들겨 맞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대에 서는 게 좋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나 돈 있다? 느닷없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둬 장 꺼내더니 그것을 천천히 찢어가면서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불렀다.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살짝 허스키한 음색은 들판의 해금내 쩔어든 바람 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헛간 바람벽에 묻은 쥐 오줌 냄새를 아끼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든 말든 음표 한 개 한 개에 허투루 다가서는 법 없이 허스키한 음색만으로 소리길을 터 가던 목소리. 배꼽을 올려붙이듯 “밤새 새소리에 지쳐버린/ 한 잎마저 떨어지려나/ 먼 곳에 계셨어도/ 피우리라/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에 피 냄새 엉기는 목타루. 지폐 찢던 손가락을 꽉 쥐고 세상을 덮쳐버릴 듯 격렬해지려는 목타루를 애써 참던 음색에 나는 정신없이 빨려들었다.
  캬바레 전속 자리에서 쫓겨나 포장마차에서 노래품을 팔지언정 불공평한 거래 풍토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창법을 지키며 노래에 목숨 걸었을 가수. 스물두 살의 가슴에 사정없이 파고들었던 진짜 ‘카수’. 해금내 묻은 그녀의 음색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리토피아』, 2022년 겨울호.


이병초 약력: 전주 출생, 1998년 《시안》에 연작시 「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이 있고 시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가 있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

주소: 전북 완주군 봉동읍 보상길 25-22
이메일: kbc88@wat.ac.kr









[2022-12-06 22:51:26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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