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洋의 홈



웃으면서 울면서
작성자 : 鄭洋  (홈페이지)



바람쟁이 하나쯤

- 정양

마을 여인네들 일을
성민이는 절대로 입에 담지 않지만
마을 여인네들 아닌 경우
술자리에서 가끔씩 안주 삼을 때도 있었다

어느 초가을 오후 성민이가
낯선 들길을 지나다가
새 보는 아낙네를 덮쳤는데
가마니 깔린 논두렁에 납작 깔린
그 아낙네, 나이 좀 지긋했던지
자네는 어머니도 없냐고
나무라듯 원망하듯 하면서도
하여튼지 간에 고마운 젊은이라며
성민이 까 내린 볼기짝을 덥썩
껴안으며 쓰다듬으며 하더란다

마재마을 이런저런 쟁이들 지금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예나 이제나 허망하고 팍팍한 한세상에
그런 바람쟁이 하나쯤 그 마을에
아직도 남아있으면 좋겠다

- 시집 <암시랑토앙케>(모악, 2023)

* 감상 :

지난달 2월 11일, 전주 베스트웨스턴 플러스 호텔에서 정양 시인의 시집 <암시랑토앙케> 출판기념회가 있었습니다. 지역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인은 이번 시집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시집이지 않을까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신작 시집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지인이 이 시집을 추천해주었는데, 시집을 받자마자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웃으면서 울면서 또 아슬아슬 다음은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가슴을 졸이면서 단숨에 다 읽고 말았습니다.

시집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는 그가 자란 마현리(마재 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해내는 시들로, 마치 전원일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2부에는 9년 전에 냈던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 이후 간헐적으로 썼던 시들을 한데 묶었습니다. 특히, 1부에 수록된 시들은 시라기 보다는 어릴적 추억을 소환해내는 ‘옛이야기’라고 하면 딱 맞을 듯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재 마을에 살았던 인물들 – 가는 귀먹은 이 생원과 그의 아들 도근이, 땡공 김 영감, 한익이와 그의 아버지 흥만, 종기형, 외동딸 시집 보내고 외딴집에 사는 여산댁, 점쟁이 할멈, 아편쟁이 윤 생원, 바보 선열이, 그리고 선열이의 동생 봉주, 수일이와 선주 누나, 돼지를 반려동물처럼 길렀던 종완이, 복철이, 허풍쟁이 허 생원, 허구한 날 은행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는 황 영감과 허 영감, 용식이, 주막을 하는 봉순이네 할머니, 풀무 화덕 어깨에 매고 다니는 땜쟁이, 야꼽쟁이 정 영감, 바람쟁이 성민이, - 이 웬만한 장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보다 많습니다.

‘육백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 / 일백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 들판 끝 야산자락 마재마을에는 이런저런 쟁이들이 살고 있었’는데(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 감상하는 시는 그중에서도 ‘바람쟁이 바람둥이 오입쟁이’였던 성민이에 대해서 쓴 시입니다.

‘마재마을 이런저런 쟁이들 지금은 /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 예나 이제나 허망하고 팍팍한 한세상에 / 그런 바람쟁이 하나쯤 그 마을에 / 아직도 남아있으면 좋겠다’면서 시를 마무리하는 걸 보면, ‘허망하고 팍팍한 한세상’을 살아온 시인도 이제는 삶의 종착역에 다다를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스스로 예견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질펀한 남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린 시들이 주는 토속적인 맛은, 이 시집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시어가 시집의 제목이 된 시를 한 편 더 읽어보겠습니다.

땜쟁이 노래

- 정양

구녁 난 냄비 때워유
솥단지 금간 디 때워유
내오가느 금간 디도
소문 안 나게 감쪽가치 때워드려유

풀무 화덕 어깨에 메고
이 마을 저 고을 드나든다고
괴얀스레 의심허지 마러유
들락날락 들락날락험시나
밀고 땡기고 밀고 땡기는
풀무지레는 이골나씨유 벌거케
화덕 달구는 디도 이골나씨유

바람난 예편네 바람 구녁도
다시는 바람 안 나게
야무지게 때워드려유
엉겁겨레 빵꾸 난 숫처녀도
암시랑토앙케 때워드려유
엿장수한티 헐갑세 넘기지 마러유
냄비 구녁 바람 구녁
줄줄줄 새는 건 다 때워유
가마솥도 금슬도 금간 건 다 때워유
풀무지레 이골나씨유
화덕 달구는 디도 이골나씨유

* 암시랑토앙케 : 아무렇지도 않게. ‘암시랑토 않다’는 아무렇지도 않다, 별 일 없다, 괜찮다, 무사하다 등의 뜻을 지닌 전라도 말.

- 시집 <암시랑토앙케>(모악, 2023)

금이 간 것을 때우는 것, 그리고 벌겋게 달구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땜쟁이는 ‘이골나씨유’라는 토속적인 사투리로 크게 소리 지르고 있는데, 이것을 시인은 소리 나는 그대로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골이 난 분야는 꼭 냄비나 솥, 가마솥만이 아니라, 바람난 예편네와 실수로 처녀를 잃은 사람까지 암시랑토앙케 때워준다고 하는 ‘해학이 넘치는 표현’이 그의 걸쭉한 사투리 장단에 맞춘 신명 나는 판소리 한마당을 감상하는 듯합니다. 이제 조금 먹고 사는 일이 풍성해져서 살만해졌다고 하지만, 한평생 살아가면서 누군들 금가고 구멍 나고 깨진 곳이 왜 없을까. 시인이 살았던 그 시절, 마재마을에서 신명나게 웃음을 주는 장단으로 소리쳤던 땜쟁이가 ‘하나쯤 그 마을에 / 아직도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이, 서로 다른 시이지만 서로 일맥상통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3년 전 그의 시를 감상하면서(https://jamesbae50.tistory.com/13410797) 찐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의 신작 시집 속에 있는 옛이야기 같은 시들을 읽으면서 또다시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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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15:30:29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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