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며 바쁘게 돌아치던 내 어머니가 가끔 흥얼거렸던 노래 가사다. 아마도 백중날이었을 것이다. 그날 하루 동네 어른들은 농사일을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먹자판을 벌였다.
노랫가락과 춤사위도 빠지지 않았다. 그 놀이에서 어머니는 닳아터진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장고앞잡이로서 판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당에 다니며 ‘집사’라는 직분을 맡은 이후 어머니는 찬송가를 입에 달고 살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거나 나쁘거나 “주여, 주여”가 말끝마다 따라 다녔다. 백중날의 흥겨운 모습은 아득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현옥씨네 마당의 백일홍.
내가 “화무십일홍(열흘 붉은 꽃이 없다)”의 깊은 뜻을 알게 된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말이 얼마 전에는 정치판에서 오르내린 모양이다. “권불십년(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십 년을 가지 못한다)”이란 표현은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망나니들의 칼춤을 ‘화무백일홍’쯤이야, ‘천일홍’까지도 참아낼 것 같다. 그러나 십 년이라니! 이것 참 길어도 너무 길지 않은가.
앞마당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떡하니 심고 싶었다. 큼직하지는 않더라도 “태고의 풍상을 겪은 채 쓰다 달다 말이 없는”(『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돌-침묵하는 미학 편) 돌도 한두 개 놓고 싶었다.
남편의 친구 중에 돌을 다루는 사람도 있겠다, 마당이 꾸며지기 전에는 정원석 정도가 아니라 돌을 깎아 만든 작품 얘기까지 오갔었다. 그런데 막상 마당 공사가 시작되자 남편은 돈이 너무 들어간다고 입을 꽉 닫았다. 혹시 내 입에서 돌 이야기가 나올까봐 수시로 입단속까지 시켰다.
백일홍나무 아래 물이 담긴 돌확에 붉은 꽃잎 몇 장 떠 있는 모습을 상상했었으나 이런 이유로 나는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허기를 안고 이천 원짜리 백일홍 씨앗을 사서 심었다. 작년 5월의 일이다. 꽃씨를 심어본 기억이 없는 나는 수십 립의 꽃씨를 다루기가 난감하였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맨땅 두세 곳에 고랑을 낮게 파고 씨앗을 묻었다. 그리고 밟으면 안 되겠기에 나름의 표식도 해놓았다.
현옥씨네 마당의 백일홍 꽃밭.
6월 중순이 되자 모래땅이 스물스물 열리면서 싹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자고 일어나면 쑥쑥 자라났다. 7월 초순 즈음에는 분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양이 많아서 반나절 가까이 이곳저곳에 옮겨 심었다. 얼마 후 붉은 계열의 꽃들이 우후죽순처럼 피어났다. ‘십일홍’만 알고 살았던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백일홍은 잔디를 제외한 온 마당을 뒤덮으며 무질서의 극치에 다다른 것이다.
올해 6월은 상당히 가물었다. 뭔가 올라오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으나, 그것이 잡초인지 백일홍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새싹들을 밟을 수도 있겠다 싶어 조심조심 땅을 디뎠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애들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반가웠다.
여기저기 쏙쏙 올라오는 것들을 향해 물을 뿌려줬다. 상황이 작년과 비슷해졌다. 7월 장마가 잠깐이라도 누그러질 때면 나는 모종을 했다. 마당 양쪽 중간쯤에 군락을 만들어보자고 흩어져 있는 백일홍을 옮겨 심었다. 약간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늦게 싹을 틔우는 애들이 많아서 올해에는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
작년에는 키도 고만고만했고 꽃도 비슷한 시기에 폈던 것 같은데 올해에는 편차가 심한 편이다. 생육환경이 제각각이어서 그랬겠지만 어떤 것은 꽃 핀지 20여일 된 것도 있고 꽃은 커녕 아직도 땅꼬마들이 많다.
오늘도 먹구름이 마당을 노려보고 있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 양쪽으로 구름을 몰아내고 장대비를 쏟아 붓을 것 같다. 백일홍의 가늘가늘한 허리를 '작신' 분지를 기세가 역력하다. 이전에도 몇 차례나 이런 현상이 일어났지만 올해도 백일홍은 제 이름값을 빛내리라. / 이현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