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무지막지하게 덥다. 습도도 장난이 아니다. 불볕인데 끈적끈적, 가끔 들이닥치는 장대비는 매서웠다. 별의별 불길한 징조의 말들이 떠돈다. 동남아 기후로 변화하고 있다. 지진 안전지대도 아니다.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이다…….
2016년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연주자 ‘루도비코 에우나우디’는 북극해의 유빙 사이에 설치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었다. 제목은 “북극을 위한 엘레지”였다. 연주 중에도 빙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에 더해진 퍼포먼스를, 슬픈 선율을 다시 감상할 기회가 올지, 지금쯤 노르웨이의 그 빙하는 녹아서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인심 좋은 그녀가 준 '버들마편초' 한 촉.
나는 한층 게을러졌다. 무기력증도 생겼다. 심지어 머리 기능이 마비될 때도 있는 것 같다. 무슨 짓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기 일쑤다. 어느 날은 한두 시간 ‘더위 멍’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들러붙는 습하면서 끈끈한 열기와 땡볕, 선뜻 문밖에 나설 엄두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마당을 잘 돌보지 못했다. 뒤꼍 길 가상의 실버들처럼 가늘어터진 버들마편초는 잘 자라고 있는지 차타고 지나다가 슬쩍 돌아볼 뿐이다.
장대비가 좌악좍 퍼붓고 나면 여린 꽃모가지며 길고 가는 척추는 팍 고꾸라지지나 않았는지 창문을 열고 확인하는 정도다. 그녀는 손이 가지 않았어도 잘 커줬다. 한반도보다 더 뜨거울 남미 쪽이 원산지여서 잘 견디시는가. 동글동글한 보라색 꽃이 여간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버들마편초' 위에 네발나비가 앉은 모습.
인심이 넉넉한 그녀가 겨우 한 촉을 갈라줬을 때 솔직히 나는 섭섭했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얼마나 번식이 잘 되었는지 지금 보아도 대견하다. 그 한 촉에서 나온 씨앗이 3m 전방까지 날아가 꽃을 피운 것도 있다. 처음 한 촉이 뿌리 내린 근방은 다닥다닥 싹이 올라왔었다.
올 봄 나는 그것이 풀인 줄 알고 호미로 닥닥 긁어낸 적이 있다. 그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을 확인하듯 그 많은 싹들이 돌멩이 틈새며 여러 화초와 잡초 사이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내년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다른 화초들과의 거리두기가 걱정이다.
‘버들마편초’는 합성어 같다. ‘버들’은 버들잎처럼 좁은 잎 모양에서, ‘마편초(馬鞭草)’는 긴 꽃대 끝에 달린 꽃에서 말채찍이 연상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잘 지어졌다. 화초에도 작명가들이 있겠지만 어지간한 언어 감각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내가 본 적이 있는 말채찍과 버드나무는 꼿꼿하면서도 낭창낭창했던 것 같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잘 휘어질 것 같지만 부러지지 않는 강한 내면이 느껴진다. 잎과 줄기는 자잘한 솜털들이 무성하다. 맨손으로 만지기가 망설여진다.
뜨거운 날씨에 굴하는 법이 없고 척박한 땅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즈음 이런 화초들이 귀화하여 견고해진 것을 보면 동남아를 건너뛰고 남미 기후로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지금 딱 김민기 씨가 떠오르는 걸까.
한 촉에서 뒤안을 덮을 만큼 번성한 '버들마편초'
내 애창곡이었던 「아침이슬」을 작곡한 이가 김민기였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시절을 그는 온 몸으로 견디었다. 그 ‘김민기’의 장례가 삼복중에 치러졌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집 뒤에 핀 버들마편초를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결코 휘어진 적 없는 작은 생명이 인간적 삶의 동력으로 작동되기도 하던가. 입에 맴도는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의 구절이 마음에 아팠다.
오늘을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쓸쓸한 얼굴이 꽃잎에 오버랩 되었다. 더 이상 험한 꼴 보지 않고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푹푹 ’찌는 더위‘에 그의 장례행렬이 쉬이 떠나지 않는 것은 후배의 예의이자 도리이리라.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두 손 모아 빈다.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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