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봄날 저만치
이병초
뒷집 윤 씨가 삶아온 죽순을 납작하게 썬다 엊그제 앞니가 세 대나 뽑혔다던데 그 허망감을 죽순에 노릇노릇 달랬는가보다 부엌칼 낮춰잡고 생선회 뜨듯 죽순을 다뤘을 테지만 앞니 뽑힌 자리는 납작하게 썰리지 않았으리
고운 봄날 저만치 흰나비 두엇 거느린 머위들도 꽤 쇠었다
<발표시>
또랑길
동진강 가는 또랑길
보릿대 태우는 냇내가 무덥다
내 손바닥 잔금들이
소쿠리 바닥 찍어놓은 것 같다고
쫑알대는 지지배를 따라왔던 길.
논고랑에 튀는 가물치를
삽날로 찍어냈다는 말에
갯버들 속에 물떼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던 길. 아이 깜짝야. 니가 시켰지
너 이담에 뭐 될라고 그러냐?
내 겨드랑이 깊숙이 박힌 날갰죽지를
지지배는 다짜고짜 끄집어내려 들었고
노을 깔리는 강둑길에 지지배를 업고
갯내 짠내 뒤엉킨 뻘밭 속에
나는 푹푹 빠지고만 싶었다
나무젓가락으로 쌈장을 찍어 바람벽에 써 보던 이름
동진강 둑길에 깔리던 달짝 같은 시간을
나는 자살처럼 아꼈다
너 이담에 뭐 될라고 그러냐. 쫑알대는 목소리가
동진강 가는 무더운 또랑길에
풀잎처럼 자꾸만 둥글게 휘어진다
덧글:동진강이 내준 물길이 못도랑 또는 수로(水路)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또랑’이라고 불렀다. 며칠 전 여기를 가보았는데 또랑은 있는데 갯버들은 없었다.
-『에스프리』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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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5:08:55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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