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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옥씨네 마당12. 구절초-가난한 집 딸들의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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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난한 집 딸들의 꽃 - 구절초
이 지면에 마당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알게 된 일들이 많아져서 내 머릿속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많이 아는 척, 내 생각만 옳다는 착각,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던…, 자만과 오만에 빠졌던 한 때. 당연히 아는 줄 알고 의심하지 않고 불러왔던 구절초라는 이름이 그렇다.
음력 9월 9일에 꺾는 풀(약효), 또는 아홉 번 꺾인다는(이 시기에 아홉 마디의 줄기가 됨) 뜻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예로부터 생리통, 월경 불순, 냉증, 불임증 등 여성들의 병에 약재로 쓰였다는 것을 알고 내 머리는 한층 복잡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이가 육십을 넘어가고부터 나는 최근에 습득된 지식이나, 사건 등은 쉽게 잊어버린다.
동네 친구들은 내가 어렸을 적 경험한 소소한 일까지 잊지 않았다며 칭찬이 자자하지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징후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모두 맞느냐는 것이다. 때때로 왜곡되었거나 윤색했거나, 과장됐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에 내 기억들은 대체로 아프다. 비단 쓰디쓴 과거만 있었겠는가. 달큼하고 미소 지었을 법한 기억은 어디로 증발해 버렸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더듬거린다. 지나간 가을, 젊은 한때 구절초에게 저질렀던 무례함에 대하여...
앞산과 들판, 뚝방에는 여기저기 꽃들이 한들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구절초를 구해오라는 지상 명령을 내렸다. 낫이 없는 나와 동생은 꽃모가지를 툭툭 꺾었고 오빠들은 낫으로 아랫동강을 베거나 뿌리째 뽑았다.
찬바람이 선득선득 불어오고 우리 집 담벼락 옆에는 구절초가 가을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내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곤 하였다. 구절초 달인 쓴 물을 마실 일이 심란하기도 했지만, 구절초가 상징하는 겨울에 대한 암시 때문이었다.
나는 추위가 싫었다. 손발과 얼굴이 트고 동상까지 걸려야 마무리 되는 겨울이 끔찍했다. 구절초 달인 물을 몇 사발이나 들이켜야 하는가. 내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이것들을 바싹 말려서 대추와 건강(말린 생강), 못난 인삼 몇 뿌리 등을 넣고 무쇠 솥에 달여 딸들에게 먹였다.
행여 우리들이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을까 눈을 크게 뜨고 종주먹을 댔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꼴까닥 삼키고 나면 생강이나 편강 한쪽을 떼어 입에 넣어주셨다. 어렸을 적에야 어머니가 윽박지르는 통에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동상에 걸려서 가지나무인지 뿌리인지를 달인 물에 오랫동안 손발을 담그고 있느니 저 약사발을 후다닥 받아 마시고 몸이 따뜻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구절초 달인 물을 수십 사발 들이켰어도 닳아빠진 고무신이나 더덕더덕 기운 양말, 장갑 없는 맨손으로는 추위와 동상과 생리통을 막지 못했다.
머리가 굵어지고부터 나는 어머니의 민간요법을 믿지 않게 되었다. 특히 구절초는 시집가서 아이를 쑥쑥 낳으라는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결혼 같은 거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맘먹은 나는 구절초 달인 물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 몰래 버린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익모초와 생쑥도 짓이겨서 즙 내어 먹기도 했다. 이 야생초들을 나는 스물 두 세 살 까지 먹은 것 같다.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나는 거의 읽었다. 얼마 전 팬데믹 기간의 사유를 담은 『바닷가의 루시』에서 작가는 본인을 가리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에 대한 글을 쓰는 늙은 여자”라고 표현했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아쉽게도 나는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것을 말끝마다 달고 사는 나이께나 먹은 여자’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번에도 구절초를 빙자하여 가난을 어필한 것은 아닌지 면목이 없다.
오늘은 양력 10월 9일이다. 음력 9월 9일은 양력으로 10월 11일이다.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활짝 피었어야 할 구절초는 오늘도 못다 피웠다. 지난 여름 작렬했던 더위 때문인지, 뭐든 늦되는 우리 집 마당의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야생을 좋아해서 거름에 의존하지 않은 이유도 뽑으라면 뽑겠다. 우, 그러고 보니 그 옛날의 절기가 요 몇 년 사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젊은 시절 구절초 달인 물을 거부하고, 어머니처럼 험한 인생을 살지 않으리라, 비혼을 선언했던 나는 뒤늦게 혼인하여 아이를 두었다.
지금 내 몸은 열이 오를 때가 종종 있다. 두 번 다시 쓰디쓴 그 물을 삼킬 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급변하는 이상 기후가 걱정이다. 벌써부터 올 겨울 한파가 닥칠 거라는 풍문이 돈다. 「두 번은 없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는데...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출처: JB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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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12:46:07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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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구님 댓글입니다
“작렬하는 태양....”이라는 문장이 눈에 밟혀서 찾아보니...
작렬[炸裂]
운동 경기에서, 골이나 홈런 따위가 통쾌하게 성공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작열[灼熱]
1.태양이나 불 따위가 몹시 뜨겁게 타오름
2.불에 새빨갛게 닮
3.몹시 흥분하거나 하여 이글거리듯 들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짧아서 귀해진 가을, 모다 잘 누리시오~~^^ |
2024-10-10
13: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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