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회. 길 가상집에서 내다보는 풍경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3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이 가운데 의무적으로 읽은 책은 24권 남짓이다. 독서모임 2곳에서 월 1권을, 나머지는 개인적인 취향과 필요에 따라 읽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올해에도 그럴 것이다.
조금 버겁다. 덜 읽고 바깥으로 나돌아 다녀야겠다. 서서 하는 독서를 즐겨야겠다. 노안에다 난시가 더해가는 내 눈이 고맙고 미안하여 당부의 말을 전한다. 좋아질 리는 없더라도 서서히 나빠지기를 바란다.
글쓴이 이현옥 선생의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팜파그라스.
나는 30~40분가량 책을 읽고 나면 책상을 떠나야 한다. 집안 여기저기 볼 일을 마친 후에는 마당을 내다보곤 한다. 날씨가 좋을 때는 두세 번 현관 밖을 나설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다. 이것이 나의 신체에게 특히 눈을 혹사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푸르렀던 잔디와 팜파그라스는 색깔이 거의 비슷해졌다. 맑고 탁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발이 되었다. 블루와 그린빛 나무들도 생기가 없어졌다. 하지만 남천은 유별하다. 차가울수록 붉은빛을 발한다. 그렇게 보인다.
멍 때리거나 양치질하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을 볼 때도 있다. 폐지와 병 등,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주워 나르는 노부부가 가장 눈에 띈다. 빈 수레나 빈 자전거로 돌아가는 적이 거의 없다. 그분들은 결코 함께 다니지 않는다. 수거하러 나가는 시간도 각각 다르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분들은 알부자라고 한다. 몫 좋은 곳에 수백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거나 돈을 벌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모양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반절 이상 구부러진 노부부의 허리춤을 볼 때 내 맘은 심란해진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앞집 할머니와 그녀의 친구 목소리는 크다. 눈치로 듣고 인사를 하고, 가끔 동문서답을 주고받는 것 같다. 요즘에는 바깥출입이 거의 없다. 남의 밭에 일하러 가지 않는다.
마을에서 2차선 도로로 나갈 때 보이는 정원 모습.
아, 잊을 뻔 했다. 항상 선캡을 머리에 두르고 손에 부채를 들고 다리를 절룩이면서 이것저것 둘러보며 떠돌아다니는 치매 걸린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한때 상남자였던 먼 친척 오빠는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더니 나온 모양이다. 지팡이를 짚고 찬찬히 걷고 있다.
헬멧을 쓴 자전거부대가 그를 피해서 슝 날아간다. 주간보호센터와 택배 차량이 삼거리에서 머뭇거린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고 인사성이 밝은 쌍둥이 아빠는 운전도 점잖게 한다. 마을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부녀회장과 70대 초반 할머니의 소형차도 쉭쉭 지나간다.
주차된 내 차 밑으로 고양이가 기어들어가고 떠돌이 개 2마리는 잊을만하면 잔디밭에 들어와 똥을 누고 간다. 동쪽 인력사무소의 경계목에서 떨어진 나뭇잎들도 드나든다. 고음의 떽떼구르르.
겉으로 보기에 소소한 모습도 들여다보고 있으면 책읽기만큼 재미있다. 똑같은 모습은 한 번도 없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그랬을 것이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 했다. 팜파그래스의 바싹 꺾이는 모습을 보고 체감온도를 예측한다. 누런 잔디밭에서 종종대는 까치의 문안인사에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 변화무쌍한 저 하늘 얘기도 빼놓을 수 없지...
집을 짓기 전 나는, 도시 외곽에서 십여 년 정도 주택살이를 해 온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었다. 아파트에 비해 잡일은 좀 있지만 나름 살만하다고 했다. 전원생활을 폭풍 해보겠다고 산 아래나 물가 등 외딴 곳으로 가는 것을 말렸다.
눈앞에서 사람도 차도 왔다리갔다리 해야 심심하지 않고 무섭지 않다고 일장 설교를 했다. 사람구경이 얼마나 재미난데 골짜기로 들어가 산과 하늘과 물만 쳐다볼 거냐고 극구 말렸다. 친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차선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갈 때 보이는 정원 모습.
책 읽고, 영화보고, 글쓰기는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가라앉게 만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다. 거의 모든 과정과 여정이 녹아있다. 길 가상집에서 나는 작은 세상을 만나고 점점 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잘 늙어가기를 꿈꾼다. 하지만 늘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한쪽 귀가 어두운 남편이 요즈음 TV를 자주 켠다. 소리를 잔뜩 높이고는 뉴스 채널을 찾아 리모컨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댄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탄핵거부권 행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얼마 전 앞집에 빵가게가 생겼다. 칠흑 같은 새벽에 불이 켜져 있을 때가 많다. 젊은 남자의 빵을 만드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빵을 사려고 낯선 사람들과 차량들이 자주 등장하여 한층 더 재미나다. 그런데 상호가 ‘시고르지쁘앙’이란다.
이것은 프랑스어인가, 일본어인가. 주인장에게 물어본다는 것을 아직도 묻지 못했다. 다만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는 책이 연상되어져 질문을 던지지 않기로 맘먹었다.
나도 누군가의 글이나 영화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영광이 될지 뭐가 될지는 정말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이번 글로 연재를 마친다. 지면을 허락해준 강찬구 주간과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이 글에 등장한 인물들께도 감사를 전하며 이만 총총. <끝>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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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B포스트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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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11:46:4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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