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양만 없다
안도현
2025년 5월 31일 오후, 정양 선생님이 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그때 중국의 동북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비행기표를 구해 조문을 가면 먼디서 뭣하러 왔어, 라고 나무라실 것 같았고, 조문을 포기하면 만주벌 눈보라가 그리 좋던가, 하시면서 두고두고 술자리에서 농을 들이미실 것 같았다. 나는 싸가지없는 자가 되기로 했다. 저녁마다 선생님께 술을 한 잔씩 올려야지, 하면서.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장백현의 한 호텔에서 강 건너 북한 혜산시로 스며드는 어둠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강을 따라 40분을 내려가면 삼수청년역을 건너다볼 수 있다고 했다. 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삼수군은 백석이 협동농장에서 양을 키우며 말년을 보낸 곳. 삼수청년역에서 어림잡아 30킬로미터 남쪽에 관평리 협동농장이 있을 것이었다. 정양 선생님께도 그 작은 역의 간판을 보여드리면 흐뭇해하시겠지. 이튿날 서둘러 길을 나섰다가 중간에 우리 일행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강변 도로공사로 길이 막혀 무작정 기다려야 했던 것.
중국인들이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백두산을 오르는 코스는 동서남북 네 군데다. 한국 관광객들이 주로 오르는 코스는 북파다. 나도 여행객으로 몇 차례 가본 적 있다. 이번에는 남쪽 등성이로 오르는 남파 코스다. 북파니 남파니 하는 말을 한글로 적고 그 소리를 내보면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그림자 탓이다. 고개나 언덕을 뜻하는 ‘파(坡)’의 앞에 ‘남’이나 ‘북’이 붙을 때 더욱 그러하다. 남파 간첩처럼 셔틀버스를 타고 남파를 오르는 길에 백두산의 장대한 남쪽 등성이를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버스는 북한과의 국경이 되는 철조망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눈이 채 녹지 않은 남파 정상에서 나는 동파라고 부르는 북한 쪽 장군봉을 눈으로 먼저 찾았다. 2005년 정양 선생님이 남북 교류 행사에 가셨을 때 방북해서 올랐던 곳. 2005년 남북작가대회와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나도 기회를 얻어 올랐던 그곳. 선생님이 그곳에서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정양, 「토막말」 한 구절)하고 소리치고 계실 것 같았다. 나도 꽁꽁 언 천지 얼음장에다 대고 소리를 내질렀다. 선생님보고자퍼서죽껏습니다씨펄.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선생님은 같은 해 한국일보에 소설이 당선된 윤흥길을 익산의 한 축하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후 두 분의 인연은 “유난히 터놓고 지내는 사이”로 이어진다. 1980년에 나온 첫 시집 『까마귀떼』의 발문은 윤흥길의 유려하고 사려 깊은 문장이 낳은 명문이다. 정양 선생님은 윤흥길을 “오며 가며 일없이 자주 만났다”고 무심한 척 말했지만 그 무심한 듯한 표현은 친구 윤흥길에 대한 더없는 신뢰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돌려서 말하는 화법은 선생님이 특허를 낸 레토릭이다. 이 발문에서 윤흥길은 정양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는 내 가난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끊임없이 내게 영감을 나누어 주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또 때로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섬찟 찔러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두엄자리에 앉았다가 꿩을 주운 셈이다.
정양 선생님은 친구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느릿느릿 털어놓았던 모양이다. 1920년대에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아버지 정을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집단 학살의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전북 김제 고향으로 귀국한 정을은 식민지 하의 청년과 농민들을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 두 차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 그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이후 정양 선생님은 아버지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점쟁이가 예언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 집안에 구렁이 한 마리가 찾아들었다. 이 이야기는 정양 선생님의 시 「내 살던 뒤안에」에 선명하면서도 몸서리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었고, 윤흥길 「장마」의 모티프가 되어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7월 18일 정양 선생 49재 때 윤흥길은 자신의 「기억 속의 들꽃」 또한 외우 정양의 한국전쟁 체험에서 소설이 출발했음을 밝힌 바 있다. 정양 선생님은 이념의 대립과 정치적 혼란 속에 아버지의 행방불명이라는 가족사의 고통을 체험했다. 그 고통은 삶의 모서리마다,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이를 휘감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감당하기 위해 그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향에 아버지의 영혼을 모셔 와 무덤을 만드는 일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육신 한 줌 없는 초혼묘.
2005년 방북했을 때의 기록은 정양 선생님의 홈페이지(www.jyang.org)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래전 후배들이 만들어드린 헐렁한 빈집 같은 홈페이지다. 당신이 떠난 뒤에 열어보니 정양 선생님은 여전히 거기에서 드문드문 글을 쓰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홈페이지라는 신문물이 흑백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 같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이 시조 「석류」를 쓴 이가 시조시인 조운이다. 전남 영광에서 주로 활동했던 조운은 정양 선생님의 이모부다. 조운의 부인 이름이 노함풍이고, 정양 선생님의 어머니가 노함안이다. 이종사촌인 홍제와 청제는 어린 시절에 김제 정양 선생님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조운은 194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함으로써 한국문학사에서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방북했을 때 정양 선생님은 조운의 소식을 하나라도 얻어보려고 마음을 잡수셨던 모양이다. 북한 안내원들의 소매를 붙잡고 두어 차례 부탁도 했다. 노력해 보겠다는 안내원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유족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한 가닥의 소식은 얻어들을 수 있겠거니 여긴 선생님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은 사적인 희망 사항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생님은 낙담한 나머지 함께 동행한 소설가 이병천과 과음으로 공허를 때우고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학생궁전에서 공연을 보고 나와서도 ‘이동식 가두리 양식장’ 같은 버스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분단의 현장 한가운데서 선생님이 깨달은 건 이 세상이 ‘야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방문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50분밖에 안 걸리지만 그곳이 다시 만나기 어려운 먼 곳임을 확인하는 눈물, 우리의 야만에 대한 체념과 분노로 범벅진 눈물, 슬프기도 하고 무언가 억울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던, 그 눈물로 범벅진 얼굴이 자꾸 안타까웠다. 다음 행선지를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도 펑펑 울었다. (중략) 여기가 삼팔선쯤 되나 휴전선쯤 되나. 해방도 되기 전에 서둘러 삼팔선부터 그어놓았던 미국의 야만과, 그 밥에 그 나물인 남북의 하늘이 함께 저물고 있다. 구호와 초상화와 동상과 통제의 나라에서 간판과 부패와 패륜과 가짜가 맘놓고 득실거리는 나라로 온다. 잠시 진짜가 되었다가 다시 가짜로 되돌아오는 길인지 잠시 가짜 같은 허세를 부리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길인지 빙글빙글 롤라에 실려 나오는 내 여행가방이 낯설다. 잘 가시라 다시 만나자고, 잘 있으라 다시 만나자고 진짜와 가짜들이 어두워진 하늘 아래서 서로 안타깝게 손을 흔들고 있다.
2007년 12월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산문화재단, 그리고 중국작가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한중문학인대회’가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열렸다. 고은, 황석영, 모옌, 은희경, 신경숙 등이 참여한 이 자리에 정양 선생님과 나도 끼어 있었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이었고, 정양 선생님보다 한 살 아래인 황석영이 서로 친구 먹자고 술판에서 말을 틀 때였다. 그때만 해도 상하이의 북한 음식점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거기에서 선생님은 그날도 대취하셨고, 다음 날 우리가 묵었던 호텔 1층에 자리한 그 음식점 간판을 바라보며 선생님은 눈을 떼지 못했다. 떠나기 싫다고 응석을 부리는 소년 같았다. 울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 껀중한 키로 구부정한 어깨로 호텔 기둥에 기대 펑펑 우는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그 울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북한을 다녀와서 사적인 바람과 열망이 거세된 사회의 경직된 실정을 몸소 체험했음에도 어디에서 울음이 새어 나오는 것일까. 연민일까.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것일까. 당신의 아버지가 꿈꾸던 세상이 비현실처럼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슬픔이 복받쳤던 것일까. 정양 선생님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이영진은 “해방공간 그리고 분단 체제로의 이행과정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개인적 자아가 어떻게 그 지난한 역사적 시간을 내면에 수용해 현재적 상처로 복원, 구원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상처투성이의 역사를 내면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복원하는 데 평생을 바친 시인이 정양 선생님이라면, 그렇다면 그 울음은 상처 입은 짐승이 내지르는 비명이었을까.
정양 선생님은 1933년에 김기림이 신석정을 ‘목가시인’으로 부른 이후 신석정을 내내 그 규정에 가두어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신석정의 ‘촛불’이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희생적 시정신의 상징쯤”으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라야 어찌 되든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소시민적 근시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책과 거부와 고통과 혐오감을 석정 시인은 시집 『촛불』에 고심의 음각으로, 그러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소박하게 새겨 놓았다.”는 게 정양 선생님의 진단이다. 신석정의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1988년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해 몇몇이 전주에서 자주 머리를 맞댈 때였다. 우리는 문학단체 가까이 좀체 발길을 내밀지 않는 정양 선생님을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고 모의를 했고, 그때부터 선생님의 고교 동창인 이광웅 시인, 섬진강의 김용택 시인과 함께 우리의 ‘어른’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 이광웅 시인이 ‘오송회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고초를 당할 때 대공분실 고문실에서 친구 정양의 이름을 발설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여파로 정양 선생님에게도 정보경찰의 감시가 뒤따랐고 적잖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부도덕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간첩 조작 사건은 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 두 분 사이를 두부 자르듯이 잘라버렸다. 199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지회를 창립한 이후, 정양 선생님은 자주 전주 시내 술집에서 늦게까지 자리를 이어갔다. 선생님이 우석대학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을 때 문예창작학과가 생겼고, 나도 운 좋게 선생님 옆방에 연구실을 얻어 들게 되었다.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동료들은 선생님의 연구실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그때 낄낄대며 들은 선생님의 ‘와이당’ 강의를 모두 모으면 족히 책 한 권이 되고도 남으리라. 그 몇 년 동안 나는 시를 새로 쓰게 되면 매번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매번 한두 행을 지워보라고 귀띔해 주셨다. 가차 없었다. 나는 매번 선생님의 분부를 충실히 따랐다.
전주를 떠나 용인 피오레 아파트로 이사 간 이후, 전주는 텅텅 비었다. 우리는 애비 잃은 자식들처럼 외로웠다. 가끔 선생님의 아파트로 찾아뵈면 1층 정원으로 내려오신 선생님과 볕을 쬐며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선생님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 사는 아파트는 이름이 피오레
피오레는 이태리말로 꽃이라고 한다
이름 값하느라고 이 아파트 뜰에는
갈 봄 여름 없이 온갖 꽃들이
철 따라 피고 지는데
철들면서부터 늙어버린 지금까지
봄마다 철없이 나를 들뜨게 하는
그 진달래만 없다
진달래만 없는 이 적막한 뜰에서
나는 오늘도 철없이
진달래만 그립다
―유고시 「진달래만 없다」 전문
정양 선생님은 봄철에 피는 꽃 중에 철쭉류의 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철쭉은 나이 들고 삶에 찌든 헤픈 주모의 행색 같다고 했다. 유난히 진달래를 편애하셨다. 진달래 피는 철이면 들떠서 운전대를 잡고 그 뜨거운 진달래를 보러 골짝을 쏘다니곤 하셨다. 경천저수지 벼랑의 진달래와 익산 심곡사 올라가는 길 솔숲의 진달래, 금산사 가는 길목의 진달래를 보고 나서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몇 차례나 하셨던가. 진달래의 그 흐드러진 분홍빛에서 뒤틀린 역사가 만들어 낸 울음소리를 ‘환성처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젊은작가포럼에서 제정한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의 수상자가 정양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생전에 내가 사람들을 부추겨 이 상을 당신이 받도록 했다고 알고 계시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시가 받은 상이에요. 만년필 한 자루가 부상이었던가요. 그 만년필은 선생님을 따르는, 정신 제대로 박힌 모든 후배들이 드린 거예요. 그 만년필로 여전히 띄엄띄엄 시를 쓰고 계신가요? 손목에 힘이 빠지면 전화하셔서 시를 입으로 그냥 불러 주세요. 저희가 받아 적을게요.
-『내일을 여는 작가』, 202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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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6 14:03:3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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