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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가지(외 2편)
작성자 : 이병초 


버들가지
이병초



혼자일수록 술 끊고 건강을 챙기자고
지난겨울 구들장을 지었다
때론 일주일 넘게 누구와 말을 한 기억이 없어
말의 씨가 말랐는가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따옥따옥 따오기를 부르다 보면,
올겨울도 별일 없냐고
옻닭 국물처럼 구수한 목소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고장 난 기억회로 같았다

두어 차례 송이눈을 받아먹으며
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2023년 1월 9일, 같은 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파면당한 동료들은 어찌 지낼까
학교 주소를 삐뚤빼뚤 적으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며
말의 씨가 말랐을까
잠을 청하는 게 두려울까
어디서부터 내 일상이 배배 꼬인 걸까  
고장 난 기억회로를 못 벗고
춘분을 맞고 말았는데

복직 소식은 없어도
제비꽃은 보자고 시냇가에 나오니
연둣빛으로 빛나는 버들가지
긴 겨울잠을 털어버린 듯
는실난실 봄바람 타는 버들가지들에 다가서니
속도 없이 내 마음이 그만
야들야들해진다
                           -『문학저널』, 2023년 여름호.


초옥당
이병초



동네 초입에 터를 잡아서
지붕을 낮게 올린 집
담이 없어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일어도
마당에 잔디는 새초롬히 눈을 뜨고
텃밭 이랑에 엎어놓은 흰 달걀 껍데기들이 빛난다
내 청춘의 뿌리까지 탈탈 털어서
창을 넓게 낸 집
별별 새소리에 새벽잠을 빼앗긴 집
초옥당, 이름은 그럴싸해도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별별 상관을 다 하는 집
그림자 한쪽이 삐뚜룸하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23년 83호.
  

오탁번論
이병초



폐암이든 췌장암이든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야물게 다잡았는데도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꿈인지 생신지
귓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몸에 친친 감긴다
2023년 2월 14일 오후 9시
여기가 어딘지 답을 좀 적어달라고
숨소리가 거칠다

나 오탁번은 천등산의 아들  
이슬방울에 감기는 굴뚝새 소리를
가위로 오려내고 싶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윗몸일으키기를 했어도
시간 바깥으로 휘어진 풀잎
내 여자의 눈매처럼 고운 풀잎에
오오래 세 들고 싶었다
누가 내 갸울은 시간의 뒤를 밟는다 싶으면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그리웠고
어미 고래의 “가뭇한 젖꼭지마냥
곱다랗”게 예쁜 꿈에 목이 메었다
갈수록 천해지는 세상에
오롯이 빛나는 꿈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
수천 년 꽁꽁 언 꿈이 하늘에 박히는지
백동전같이 얼음 비늘로 돋는
조선의 새벽달을 나는 사랑했다
  
여기는 박달재 묵밥집인가
고려대 병원인가 원서헌인가 아닌가……
베갯잇 파고드는 파도 소리에
고개가 자꾸 쏠린다
목숨조차 귀찮은지 허리를 더 오그리는 내 몸을
파도 소리가 핥아댄다
                              -『문학청춘』, 2023년 여름호


덧글: 시집 『까치독사』 이후 「환절기」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언제, 어떤 지면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를 발표하고 나서 후회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마음에 드는 시구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상이 전개되다가 만 듯한 인상이 짙었기 때문이다. 그 「환절기」를 해체하여 「오탁번論」으로 개작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복직되었다.

이병초: 전주 출생. 1998년 《시안》에 「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이 있고 시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가 있다.

[2023-06-15 11:49:10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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