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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랑토앙케>서평. 하기정
작성자 : 이병초 



▪서평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것들
―정양 시집, 『암시랑토앙케』
                                                           하기정(시인)


1. 혼자 보기 아까운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익히 알고 있어서, 삶이 고통스러울 때 이름을 부르면 들어주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음(觀音)이다. 사람들 삶의 모습과 소리를 들어주므로 고통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 그에게 의지한다. 한편, 정신의학적으로 장애로 규정하는 관음(觀淫)은 그것과 대척에 있지는 않지만, 동음이의어로서 대비되는 관계망 속에 대입한다면, 관음(觀淫)이 유독 타인의 쾌락을 비밀리에 단독으로 도취(盜取)할 때 느끼는 쾌락이라면 관음(觀音)은 내가 들어(보아) 즐거운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전자가 외부로부터 은밀하게 끌어와 주체자(쾌락을 얻고자 하는 자)에 의해 사라지고 왜곡되어 함몰해버리는 것이라면, 후자는 말을 하는 주체자(쾌락을 느끼는 자)로부터 시작하여 확장되고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한다. 대체로 우리는 멋진 풍광을 보았을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대상이 떠오를 것이다. 혼자 보기 아깝고 혼자 듣기 아까운 것에 대해 유독 밝은 사람들을 우리는 시인의 부류로 편입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느낀 대로 듣는(보는) 사람이자 말하는(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암시랑토앙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이게 한다.
『헛디디며 헛짚으며』이후 기다린 칠 년 동안의 시간, 마침내 만난 정양 시인의『암시랑토앙케』는 그를 기다리는 독자들에게는 마른 봄날 단비 같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시력 55년 동안 1980년 『까마귀떼』를 첫 시집으로 하여, 시선집과 증보판을 모두 합해 열한 번째 만나는 이번 시집은, 시인께서“제일 가난했던 내 소년시절, 내가 겪은 가난한 들마을 사람들의 얘기들을 민화(民畵)처럼 투박하게 그려본 것이”며 “밑이 째지게 가난했어도 더러는 구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시인의 말을 통해 밝힌다. 1부의 제목 <들마을 민화>는 그렇게 문을 연다.

갈 데가
집뿐인가집뿐인가
곱씹으며 집으로 가던
눈 내리는 밤이 있었다

가고 싶은 데가
고향뿐인가고향뿐인가
고향길 잃은 눈발들이
지워도 지워도 되묻는 밤

가야 할 길
가지말라고가지말라고
밤 깊도록 다 덮어버리는

눈에 묻힌 꿈길이 멀다
                                 - 「겨울밤」, 전문
                          
아득하고 아련한 고향을 그리는 「겨울밤」은 시인께서 이 시집의 1부는 민화(民畵)라고 미리 밝히며 시작한 첫 번째 시이다. 고향에 대한 쓸쓸한 회억의 심정이 담겨있다. 계속 들려주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회상을 넘어 회귀에 다다를 정도로 과거 시인이 살았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온다. 들마을 사람‘도근’이와‘이생원’이 첫 번째 등장인물로 나오면서(「더 큰 소리로」) 고요하고 쓸쓸한 마음자리를 해학으로 단번에 걷어낸다. 한 장의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생한 장면들은 각각의 시편마다 서사가 뛰어난 장편(掌篇)이다. 땡공이 김영감, 종기형, 여산댁, 윤생원, 학인이, 바보 선열이, 수일이, 종완이, 선주 누나, 학인이 엄마, 복철이, 허생원, 황영감, 용식이, 정영감, 성민이 등, 한마을에 살았던 장삼이사들의 거대 서사시로 펼쳐진다. 민화(民話)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문학의 고전적인 코드인 해학이 담겨있다. 「더 큰 소리로」,「진잡수유?」,「짜짜놀이」,「보리타작」에 나오는 웃음유발자와 희화의 대상은‘영감’들이다. 장유유서가 대대로 내려오던 시절, 마을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어른들이었다. 이런 권위를 적으로 생각하는 주체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억압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싶은 (귀여운)욕망이 발동한다. 권위와 위압으로부터‘간신이 벗어난’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유머다.

“울 아부지 이르미 흥마닌디유”
“네끼 숸 못된 녀르 자식 가트니라고,
웃어른 이르믄 함짜라 허는 거시고
함짜는 한 자씩 띠여서 짜짜를 부치는 거시여
(중략)
김영감의 짜짜놀음에서 간신히 벗어난 한익이는
가던 길 뛰어가며 땡공노래를 지어 불렀다
“여엉감님 함짜는 땡짜 공짜인가유
땡공땡공 험시나 어디를 간대유”
                         - 「짜짜놀이」, 부분                        
                                            
어른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큰 물고기에 맞서는 정어리 떼들처럼 아이들도 무리를 지어 어른들의 세계에 대항하는 것.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아이들에 의해 일그러지는 기득권‘땡공영감’의 가벼운 권위의 추락이다.(「진잡수유?」) 그러나 이는 조롱과 풍자가 아니라 순박하고 착한 선의의 복수인 것이다. 이마저도 「보리타작」에서 보이는 김영감은 풋보리를 훔쳐 구워 먹는 ‘보리타작’을 하러 온 아이들을 위해 직접‘구운 보리를 한 줌씩 집어’준다. 정양 시의 해학은 마을 사람의 캐릭터에서 오는 동정심을 동반한다. 배고픈 시절의 인정과 짠한 물기를 인물의 행동과 구수한 전라도 말씨 속에서 느낄 수 있다.

2. 내게 없는 것을 당신의 ‘있음’으로 채워주오

「도둑질」,「다시 만나서」,「짚 한 다발」,「봄밤 설치며」는‘혼자 사는 여산댁’과 ‘도둑’의 이야기이다. 마을에서 일어난 애정담을 소재로 한다. 어찌 보면 통속적이고 그 시절 어느 마을에나 한 번쯤은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지만, 70여 년 전 시인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없이 살던 시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워주고자 하는 정을 남녀 간의 애정담으로 대변했을지도 모른다. 로맨스에 관한 스캔들만큼 세간의 이목을 쫑긋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덮어두어야 할 것이기에 더욱 들춰보고 싶은 욕망이 준동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는 매우 은밀하고 사적이어야 하는 영역이 공적인 사건으로 부상했을 때의 그 소란함과 건강한 유머가 로맨스의 사건 안으로 답지하기 때문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도둑이
그림자처럼 싸립문을 빠져나가고
다 알고 있다는 듯 닭장에서 홰를 치며
유난히 길게 목청을 뽑는 첫닭이 운다
아직껏 입지도 벗지도 않은 여산댁이
도둑이 사라진 싸립문을 건너다보며 중얼거린다

“오너른 내가 나 아닌 건만 가트다 아니
오너른 내가 참말로 나 가트다 이 도동노마”
                                                - 「도둑질」마지막 부분                              

(추측하건데, 가난하고) 혼자 사는 여산댁의 외딴집에 훔칠 게 무엇이 있을까. 정인(情人)을 찾으러 가는 것이 곧 타인을 동정하는, 인정(人情) 아니겠는가. 도둑은 훔치는 행위자가 아니라‘너에게 없는 것’을 주러 간 사람이고 여산댁 역시 도둑에게 잃은 것이 아니라,‘나에게 없는 것’을 받은 셈일지도 모른다. 여산댁의 행동은 피해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도둑과 당당히 맞서며 요구하는 자로 그려진다. 일방이 아닌, 쌍방의 채움. “오너른 내가 나 아닌 건만 가트다 아니 오너른 내가 참말로 나 가트다 이 도동노마”동네에서 과부로 살아가며 세간의 눈이 무서워서 억눌렸던 여산댁의 욕망이 본능적으로 (강압에 의해)해결되는 사건이자 비로소 자신을 찾는 시간인 것이다. 결국, 도둑질은 훔친 사람도 잃은 사람도 없는 것으로 비춰진다. 당시의 사회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여산댁이 비난을 받지 않고 외부적으로 합법적인(?) 욕망의 해결 방식은 도둑질을 당한 피해자의 입장에 놓을 때만 가능하다. 삶은 한때 질펀한 로맨스를 꿈꾸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인생은 뜬금없이, 혹은 기다림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쳐들어 왔다가 흘러가는 것. 누구도 이 시 속의 여산댁이나 도둑에게 작금의 이즘(ism)을 갖다 대고 이러쿵저러쿵 운운할 수 없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온도 안에서는 모두 속절없고 부질없는 사념 따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다 필요 없이, 시인은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여 혼자 보기 아까운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3. ‘을(乙)’들과 ‘쟁이’들과 함께 끝까지 가보는

정양 시인의 부친인 정을(鄭乙) 선생의 본명은 정판갑(鄭判甲)이다. 일제강점기에 와세다대학을 다녔던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본명이었던‘판갑’을‘을’로 개명했다.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 서서 민중의 삶을 돌보고 실천했던 부친처럼 정양 시인의 시집 안에 등장하는‘쟁이’들은 아웃사이더, 변두리, 서민이며 민중이고 민초들에 대한 관심의 접미사이다.

통쟁이 땜쟁이 사진쟁이 갓쟁이
점쟁이 대목쟁이 허풍쟁이 야꼽쟁이
아편쟁이 소리쟁이 개구쟁이 방귀쟁이에
바람쟁이도 끼어 한몫 거들었다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분
                  
이 시는 김제 마재마을‘육백 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 일백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의 온갖‘쟁이’들을 소환한다. 물론 이 시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암시랑토앙케』의 주인공들은 모두 갑이 아닌, 을의 생을 살아가는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이 피운 모닥불 안으로 소명된‘쟁이’들은 서로 온기를 쬐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을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듯이 백석의 「모닥불」과 친연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건너온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슬픈 역사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잔한 얼굴이 아른거린다.
『암시랑토앙케』는 해학 속에 감춰지고 드러난 것들의 꾸러미를 한가득 안고 시류(時流)를 통과하여 강의 하류(河流)에 닿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담겨있다. 느리고 찬찬한 말투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나 민중들이 겪은 삶을 보고 듣고 채록하면서 강 하구에 쌓이는, 넓은 평야의 옥토를 이룩해 놓고야 만다. 2부의 제목 <질 게 뻔해도>는 그렇게 열어 놓은 대문을 닫으며 누군가 다시 열기를 기다린다.
2부에서는 유독 시간과 계절에 관한 시편들이 많다. 봄비, 가을밤, 달밤, 봄밤, 눈 내리는 밤, 눈 내리는 강가, 매미 소리, 눈 오는 밤, 밤에 우는 새, 남는 시간 등 시인이 여기까지 걸어와서 잠시 뒤돌아보며 다시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밑지고 살아도 남는 시간
남는 건지 남은 건지
집안에도 길가에도 숲속에도
아무데나 함부로 널부러진
널널한 그 시간들더러

함부로 야코죽지 말고
함부로 내버리지 말고
함부로 바닥내지 말고
               - 「남는 시간」부분
        
앞뒤 안 가리고
일부터 저질러버린
아슬아슬한 사랑들이
어떻게든 그럴듯한
로맨스가 되고 싶어서
잎도 피기 전에 저렇게
흐드러진 꽃으로 핀다
                - 「봄꽃」전문

지긋이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자학’처럼‘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고 말하면서도‘함부로 야코죽지 말고 함부로 내버리지 말고 함부로 바닥내지 말’자고 다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절의 순서대로 라면, 이 시가 첫 장에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계절의 끝이 어디 있겠는가. 생장수장 다음에 또‘生’하는 것을… …. 그러므로 계절의 끝은 겨울이 아니라 계절의 끝은 없다. 끝없는 순환만 있을 뿐이다. 끝이란 시작을 잇는 점일 뿐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영원함에 대한 염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첫 시와 마지막 시는 이렇게 출구이자 다시 시작하는 입구이다. 유한한 존재에 대한 구출은 다시 출구를 통해 열려 있는 문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정양 시인의『암시랑토앙케』는 아련하고 짠한 물기 어린 시선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자, 이제 정양 시인이 열어 놓은 입구를 향해 다시 시집을 펼칠 시간이다.

                                                              -『문예연구』, 2023년 여름호.







[2023-07-08 15:42:2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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