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옥씨네 마당> 11. 내가 먹고 자란 꽃과 풀과 … - 이현옥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s day”를 앞두고
승인 2024.09.25 15:55:50
11. 내가 먹고 자란 꽃과 풀과 …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s day”를 앞두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보상마을이다. 어림짐작해 보니 50여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혼인을 하면 남편의 직장 근처로 살림을 나거나, 시댁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므로 그 이전 삶의 흔적은 물론 근간마저 잊게 만들었다.
글쓴이 이현옥 선생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이 보상마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고, 지금도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언니 동생들이 축제를 구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들의 날'.
개발 또 개발, 문명의 속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좌시할 수는 없다. 일명 베이비부머 언니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고향을 오가기도 했는데 그분들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고향을 등지는 수순을 밟았다.
나 같은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다. 얘기하자면 길다.
청상과부가 된 내 어머니는 큰 오빠에게 초가삼간과 텃밭을 증여하고, 땅 한 평, 돈 일백만원도 없이 마지막 인생을 나와 함께, 내가 자란 집터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어느 글에선가 밝힌 적이 있다. 중편소설 정도의 분량에 이르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할까 한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순옥’ 언니, ‘영화’ 동생이 귀향하여 부모님과 살고 있다. 노약하고 병든 부모님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녀들과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지만 따로 만나 차 한 잔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제일 한가해 보이는 내가 움직여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제각각이다. 어렸을 적 피붙이처럼 지냈던 그 의리는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조미영’네 가족은 부모님을 제외하고 6남매이다. 2남 4녀 중 막내인 미영이가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s day”를 만들도록 동기유발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내가 이 지면에 연재했던 「...책과 영화」, 「...타박타박」을 모두 읽었더란 말씀이다.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언니들과, 나아가 함께 자란 몇몇 친구들과 공유하면서 그리움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 글에는 내가 작정하고 의도한 바는 없지만 동네이야기가 적잖이 스며있었던 모양이다. 하여 언니’s day는 고요히 소박하게 치르고자 했으나, 점점 판이 커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네 언니들은 오빠와 남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린 나이부터 밥과 빨래를 도맡았거나, 밭을 매고, 공장을 찾아 객지를 떠돌았다. 그 아픈 서사를 여자들끼리 모여 위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애썼다. 애썼다. 사느라고 고생 많았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자글자글해진 얼굴과 손을 부벼 주고 어깨를 두들겨 주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정읍의 김명관 고택에 후배들과 놀러 갔을 때 그 집 뒤란의 골담초(우리는 꽃단추라 부름)를 보자마자 서너 개 뜯어서 입에 넣었다. “에게게? 선배~”하며 그네들은 입으로 손을 가리며 말했다." <본문 중에서>
나보다 전 세대들에 비하면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되는 얘기지만, 우리 집은 하루에 세 끼니 차려먹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당과 들과 산에서 만난 꽃과 열매 등으로 뱃속을 채우며 자랐다.
얼마 전 정읍의 김명관 고택에 후배들과 놀러 갔을 때 그 집 뒤란의 골담초(우리는 꽃단추라 부름)를 보자마자 서너 개 뜯어서 입에 넣었다. “에게게? 선배~”하며 그네들은 입으로 손을 가리며 말했다. 이런 상황쯤이야 내 또래들한테는 무심코 벌어지는 일이었다.
내 어머니는 자투리땅에 온갖 푸성귀를 키워 자식들 입속에 넣어 주셨다. 꽃과 나무가 있기도 했다. 사립문 밖에는 혼인을 앞둔 언니의 장롱을 만들 오동나무가 장독대 옆에는 대추나무와 골담초, 서쪽으로 난 샛문 바깥에는 감나무가, 동쪽 담벼락 옆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꽃으로는 흙담 위 호박꽃과 장독대나 토방 아래 봉숭아꽃이 전부였던 것 같다. 아주까리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울타리 아래에는 머위와 토란, 우물가에 돌나물 등은 온통 식용용이었다. 딸들에 대한 배려로 심은 줄 알았던 봉숭아꽃이 뱀들을 쫓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실망을 했던 적도 있었다.
왕바랭이의 아랫동강을 잘근잘근 씹어 달짝지근한 물은 삼키고 비릿한 풀냄새 나는 부분은 뱉어냈다. 삐비꽃이 허옇게 피는 5월초 즈음, 억새처럼 거칠어지기 전에 속대를 뽑아 껌 인양 씹고 다녔다.
하굣길 남의 밭에 주인 몰래 들어가 목화와 밀과 보리도 한 움큼 훑어서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셀레민트 껌’이라고 들어보셨는가? 누런 벽지위에 붙여놓고 고래심줄이 될 때까지, 딱딱해져 턱 주걱이 아플 때까지 씹고 또 씹었던 껌.
"냇가의 갯버들과 오디, 머루와 으름, 땔감 주우러 가던 산길에 피어있던 찔레꽃, 아카시아꽃, 진달래꽃… 이런저런 나무들의 연한 순과 열매를 따서 먹기도 했었다." <본문 중에서>
길가상 밭들은 우리들의 손이 타서 성한 곳이 없었다. 키 큰 수숫대는 모가지뿐만 아니라 몸뚱이까지 동강나 있기도 했다.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냇가의 갯버들과 오디, 머루와 으름, 땔감 주우러 가던 산길에 피어있던 찔레꽃, 아카시아꽃, 진달래꽃… 이런저런 나무들의 연한 순과 열매를 따서 먹기도 했었다. 혹시 내 몸이 이런 화초와 열매들을 먹고 자라서 오늘까지 두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가발공장에 다니던 큰언니가 내려오면 나는 언니의 친한 친구에게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 언니는 편직기 앞에서 옷감을 짜고 있었다. 차가워진 내 손에 입김을 불어 주었던 그 언니와 내 언니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죽거나 아파서 만나지 못하는 언니들이 더 이상 생기기 전에 이 일은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
언니들이 고구마를 서리하고 있는 동안 어린 우리들은 망을 보고 있었다. 여우가 저 멀리서 울고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이 얼굴을 내밀면 나는 언니들한테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아마 이런 얘기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 날. 대망의 “그리운 보상마을 언니’s day”를 앞두고 설레는 마음을 담아...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JB포스트 jbpost2014@hanmail.net
출처: http://www.jb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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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6 18:15:21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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