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향기 - (786) 삶의 진정성과 역사의 생명력 – 정양의 「내 살던 뒤안에」/ 시인 이병초
화룡이(이창모)추천
삶의 진정성과 역사의 생명력 – 정양의 「내 살던 뒤안에」
한 편의 시에 전율과 감동이 한꺼번에 올 수 있을까. 사실과 행위의 인간적 형상화를 토대로 시는 삶의 진정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역사처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정양 시인의 「내 살던 뒤안에」는 수준 높은 언어감각이 삶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으로 확산되면서 비상한 시의 울림을 얻는다.
뒤안에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다는 비유는 생생하다. 구렁이에 놀란 아이들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는 눈부심을 지나 구렁이 몸에서 “햇빛이 치잉칭 풀리”는 데로 닿는 경이로운 활력은 언어미학이란 말 한참 위에서 반짝인다.
새소리와 팔매질, 감꽃과 손가락질과 햇빛이 구렁이에 맞물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는 정황은 차라리 전율이다. 서구의 이미지즘을 한참 벗어난 언어감각은 도저한 깊이로 꿈틀거린다. 참새떼 소리와 감꽃들과 구렁이 비늘에 부서지는 햇살과 환성이 만나서 생성되는 이미지는 독자의 몫이다. 살아서 못된 짓을 일삼은 자가 구렁이로 환생한다는 속설을 믿었을 사람들. 순박하달 수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저주가 구렁이 몸에 몰매처럼 감기는 것을 보면서 화자는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라고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시인의 연보를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이 날은 한국전쟁 초기에 행방불명된 줄로 알았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다고 점쟁이가 예언한 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족상잔만큼은 막아보자고 사회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 여운형 선생의 최측근이었다. 집안의 전답까지 팔아가면서 동족 간의 전쟁은 막아보고자 전력을 기울인 사회운동가. 그런 시인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다던 날 구렁이가 나타난 것이다. 젊은 시인의 꿈속에까지 따라와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으로 사라지는 실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가슴 두근거리며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다는 서늘한 고백이 왜 현재로 재생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시가 역사의 숨통을 물고 풀어야 할 과제이다.
저주의 대상이 된 구렁이는 생물이 아니라 부도덕한 집권세력이 만든 불순한 상징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정양 시인이 첫 산문집 『백수광부의 꿈』에서 밝힌 것처럼 김유신 김춘추 부대에 무참히 학살당한 백제의 아녀자는 궁녀였고, 갑오농민군은 화적패였으며, 왜정 때 독립군은 비적 또는 마적 떼였고, 제주도에서 거창에서 지리산에서 노근리에서 떼죽음을 당한 양민들은 빨갱이였으며, 광주항쟁를 주도하다가 죽어간 열사들은 폭도였다는, 기득권 세력이 조작해낸 기막힌 왜곡을 모르는 이도 없다.
작금의 현대사가 물고 있는 시의 자리는 쓸쓸하다. 문명적 색감을 짙게 드리운 자폐적 비문(非文)들이며 결핍과 소외를 외래어에 끼워놓은 혼종적 불안감들은 시의 내용과 따로 놀기 일쑤다. 시는 의미 전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게 정설일지라도 이 전제가 비문 투성이의 시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의미가 전달되었을 때, 시는 시어 개개의 인상과 소리맵시가 어울려 새로운 형상을 얻는 경우가 더 많다.
정양 시인의 시편들은 문명적 징후에 따른 우려가 아예 없다. 개인의 슬픔, 개인의 한계와 그리움에서 시가 촉발되었을지라도 그의 시편들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일상의 구체적인 정황에서 포착된 그의 시는 동시대 삶의 통점에 집중되면서 4.16참사와 촛불집회에까지 이르는 게 예사다. 광복 후 75년이 넘도록 독립기념일이 없는 참담한 역사, 여기에 함몰된 이 땅의 가난과 무덤조차 없이 떠도는 혼백들에 무례한 적이 없다. 이런 정양 시의 그늘에서 나는 시를 공부했다. 시대의 질곡에 짓눌리지 않는 시, 언어수사에 집중하는 시보다는 삶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언어 미학을 배웠다. 하지만 시가 무엇인지 갈수록 모르겠다. 시에 대한 궁금증과 껄떡증을 애정결핍처럼 달고 사는, 이 병증을 깎음한답시고 이틀거리로 초저녁술에 꼬라박히는 말짱 허드렛것에게 고독이나 외로움이란 고급 정서가 찾아올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양 시인의 시편들을 읽었다. 나이 먹어갈수록 챙길 것보다 버릴 게 더 많은 게 인생일지라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채/ 헛것에 매달려 살다 가는 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침내/ 쓸쓸하게 가버”(정양, 「눈길」)리는 게 인생일지라도 나는 오늘도 그의 시를 읽으면서 새삼 깨친다. 삶에 들어붙는 것들이 잊히듯 언젠간 자신도 소멸되고 말 터임에도 욕망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서늘한 정서, 그것의 인간적 형상화가 시임을.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어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 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정양, 「내 살던 뒤안에」
<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이종민, 모악, 2021.)’에서 옮겨 적음. (2024. 1.19. 화룡이) >
댓글
망고24.01.19 13:34
첫댓글 한 편의 시에 전율과 감동이 한꺼번에 올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박목월 시인의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이란 시입니다.
저는 이 실 고등학교 점심시간 잔디밭에서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시 한편은 감동과 전율을 함께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감사합니다.
화룡이(이창모)작성자 24.01.20 05:20
망고 시인님은 일찍
좋은 시적 경험을 하셨네요.
그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
오늘의 망고 시인을 있게 한 동기였을 수도 있겠네요.
고맙습니다.
의초 이정석24.01.19 13:33
고등학교 시절 부터 재능은 숨어 있었습니다
저도 고3인 1970년 5월에 시집을 구입을
했다라고요..
시를 공부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입시 공부를 하려고요...
그래도 그 때 그 시집을 여러 번 읽은
시가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입시에 2문제가 맞았습니다.
청마와 깃발 이라는 주관식 답을 잘 썼습니다.
시인 님 축하드립니다.
시가 마음 속에 들어와 차지하고
지금까지 있는 모양입니다..
망고24.01.19 16:06
시인님도 축하드립니다.
시인님 마음속에도
시가 들어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룡이(이창모)작성자 24.01.20 05:23
그때 그 시집이
과학 선생님의 인생 3막을
농부시인으로 살게 한 단초가 아니었을까요?
고맙습니다.
박서현24.01.20 11:11
시의 향기 783에도
있네요^^
<내 살던 뒤안에>
얼마전에 봤던 기억이 났다는 건만으로도
매우 기쁩니다^^
이제 더 확실히......
시인들이 이 시를 많이
추천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
출처: 다음카페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https://cafe.daum.net/sangjupoet/PxAj/5110?q=%EC%9D%B4%EB%B3%91%EC%B4%88%20%EC%8B%9C%EC%9D%B8&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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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11:20:24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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