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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드레한 눈빛의시학
작성자 : 이병초 



달보드레한 눈빛의 시학- 안성덕의 『깜깜』(걷는사람, 2023. 11)
이병초(시인)


1.

  좋은 시는 말을 아끼고 그 말씨에 묻어 있는 음색을 아끼며 말과 말이 연결되어 생성되는 가락까지 중히 여긴다. 시적 정황에 들어맞는 말을 채집하고 공교히 버무리되 입말의 음색에 딸린 가락을 놓치지 않는, 모국어의 부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안성덕 시인의 새 시집 『깜깜』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은 좀더 분명해졌다. 호흡이 긴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짧고 명징한 언어형식으로 최대한의 공감을 얻는 미학적 언술이 시임을 확인하듯 그의 시편들은 뜻을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 정답고 때로 눈알이 쓰라린 시의 정황을 속내에 들이면서도 나는 도롱테 굴리던 꼬마가 궁금했다. 꼬마가 가슴 설레며 만났을 “먼 겨울밤 초가집 처마 끝에 손을 넣고 가만 쥐어 보았던”(「비 갠 아침」) 참새의 온기, 꼬마가 그 겨울밤에 실물로 잡아보았던 참새의 할딱거리던 심장이 안성덕의 시 밑그림이자 한평생 시의 양식으로 작동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밥바라기 뜰 무렵 사람의 마을에도 등불이 켜집니다 식구들 어서 돌아오라고, 둘러앉아 밥숟가락 들자고 집집 밝힙니다 동구 밖에 검둥개 마중 나가듯 먼저 들어와 마중불 환하게 듭니다 고향 집엔 어둑살보다 먼저 저녁연기가 피어 올랐지요 가마솥 밥물내 넘쳤지요 날개 달린 것들도 개밥바라기 등대 삼아 제집에 날아들었고요
                                                        -「개밥바라기」, 부분.

  아련하다. 어스름에 겹치는 고향 풍정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어둠보다 저녁연기가 먼저 피어올랐던 마을. 주인을 기다리는 검둥개처럼 집집에 마중불이 켜지는 마을. 시인의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 인화되어 나타난 풍정에 지푸라기 타는 냄새가 날 것 같다.
  이런 마을이 지금도 있을까 싶다. “고향이라는 말조차 시들해졌는데 아직도 이런 시가 창작된다는 게 신기하다.”라고 반문하는 게 요즘의 어법일 터이다. 시인도 이를 잘 아는지 ‘켜지고’, ‘밝히고’, ‘듭니다’의 현재형 진술을 ‘올랐지요’, ‘넘쳤지요’, ‘날아들었고요’의 과거형으로 진술하면서 시를 맺는다. 하지만 시의 문법은 현재로 읽힌다. 화자의 몸속엔 꼬마와 어른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며 개밥바라기, 마중불, 검둥개, 저녁연기, 밥물내 등의 말씨에 묻은 음색들이 새 풍정을 얻는 시의 울림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시의 산문화가 요즘 창작의 대세로 보인다. 이게 잘못일 리는 없다. 시 창작의 방법론적 시도는 시의 외연을 넓히는 중요한 요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섭섭한 구석도 있다. 시의 자율적 구조에 충실한 듯 보여도 기실 동어반복의 피곤한 회로에 불과한, 자폐적 징후를 못 벗어난 팝송 가사의 아류에 가까운, 시의 고정관념에 대한 통쾌한 해체와도 관계없는 경우가 꽤 많던 것이다. 시어끼리 맞물려 새롭게 직조되는 메타언어적 형상이며 운율감은커녕 산문적 진술이 갖는 최소한의 서사조차 고민한 흔적이 없어 보이는 줄글을 ‘시’라고 명명하는 구태는 시의 맛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성덕의 시에 어린 서정의 무늬와 농담이 산문율에 삼투된 정서는 푸근하고 살갑다. 사람의 행위와 짐승의 행위가 자연물과 어울린 풍정 속에 사람의 품이 간직되어 있다. 오랜 시간 이 땅의 삶을 사랑한 사람의 품, 자본과 정보에 밀려 생활의 뒷전으로 내몰렸어도 오늘 우리는 사람의 품이 ‘시의 그늘’로 확장되는 언어미학을 만났다. 시가 거느린 그늘 속에 휴식이 있고 삶의 동력이 발효된다는 의미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과거라는 두 개의 시간이 확보한 정다운 마을로 돌아갈 수 없다. 고향이란 말에서 이미 추방된 존재이므로 우리는 시 속의 마을로 돌아갈 뿐이고 시가 확보한 형상에 침잠할 뿐이다.


보릿대는 불땀이 좋았다
마당귀 팔팔 끓는 양은솥에
대사리 살, 납작 썬 하지감자를 넣고 어머니는
반죽을 뜯었다 바가지 찬물에 첨벙첨벙
물 차는 제비처럼 뜨거운 손을 적셨다

한소끔, 채 썬 애호박에 칼칼한 풋고추
탕탕 마늘 다져 넣고 간 맞췄다
어느 날은 마른 보릿대 불기운에 땀방울이 더 흘렀던지
짭조름하기도 했다
텀벙텀벙 양은솥에 뛰어들던 별
                            -「대사리수제비」, 부분


  대사리는 ‘다슬기’이다. 전북 사람들은 다슬기를 대사리 또는 대수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감자와 수제비 반죽과 대사리가 한소끔 끓는 동안에 어머니는 얇게 썬 애호박과 칼칼한 풋고추와 마늘을 넣은 뒤 간을 맞췄다. 인공조미료를 쓴 흔적이 안 보이는 수제비는 맛이 담백하고 목에 개운했을 터이다. 이 대사리수제비 맛은 세간의 맛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소금은 짜고 고추는 매우며 된장은 짭짤하고 들큰하다는 음식 저마다의 고유한 맛과 빛깔을 존중하듯 어머니는 수제비를 끓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재료로 육수를 냈는지는 몰라도 수제비랍시고 내놓은 양푼에 달걀을 풀거나 맛소금 묻은 김을 뜯어 넣거나 청양고추를 썰어서 휘휘 저어낸 수제비는 여기에 얼씬할 수도 없다.
  대사리수제비 고유의 맛을 재생해낸 안성덕 시의 언술은 우리 음식의 조리법과 관계되는 게 아닐까. 옛 어머니들이 음식을 조리할 때 소용되는 젓갈이며 갖가지 양념들을 아끼고 쓰임새를 존중했듯 시어 개개가 갖는 빛깔과 음색이며 가락을 시에 모신 흔적이 언어의 결에 살아나기 때문이다. 수제비가 짭조름하기도 했다는 화자의 고백이 “텀벙텀벙 양은솥에 뛰어들던 별”로 반짝이는 순간 시상은 돌연 생동감을 띤다. 국물만 남았을 양은솥에 별이 실제로 떴을 수도 있지만 별을 화자의 눈물방울로 읽는 게 순리일 것으로 보인다. 시에 ‘짭조름’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화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할수록 별이 더 반짝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의 품은 여름밤의 정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국물만 남은 양은솥에 별이 뛰어들었다는 언술은 인류사 속에서 진행되는 자연인의 존재론으로 이해된다. 밥 대신에, 고기반찬 대신에 대사리수제비를 먹는- 가난할지라도 엄연히 지속되는 생활의 질서를 자본과 문명의 잣대로 재지 말라는 ‘눈물겨운 낭만’의 뜻을 얻기 때문이다.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인류사를 호령하는 무리와 관계없이 “텀벙텀벙 양은솥에 뛰어들던 별”이안성덕 시의 또 다른 자양분으로 작동되었으리라.
  안성덕의 새 시집 『깜깜』에 고향의 정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찰나를 뜻하는 「75분의 1초」로부터 「프리스비」, 「찌그러진」, 「트럭 위의 사내」 등의 작품들은 생활이 곧 시이고 시가 곧 생활인 안성덕 삶의 안팎에서 이미지가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네 살배기 손녀가 “크레용미술학원 눈썹 처마 아래 쪼그”(「눈썹 처마 아래 쪼그려」)리고 앉아서 쭈쭈바를 먹는 모습은 ‘눈썹 처마’라는 어구에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시에 필요한 요소는 ‘사랑’이라는 추상어가 아니라 네 살배기의 행위이고 빗방울을 피할 수 있는 눈썹 처마라는 사실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언어 감각이 놀랍다.
  짚수세미로 흰 고무신을 박박 문질렀을 꼬마. 시간이 후다닥 지나버려서 그가 백발의 사나이가 되었을지라도 시편들 곳곳에서 이 꼬마는 시의 상황을 주도한다. 꼬마는 “두레 밥상에 쥐똥 한 상 잘 차려진 집”(「양철 대문 집」)에 살았을 것이고, 빈 우체통에 가득한 ‘햇살 한 통’을 펴보며 “알 품은 어미 딱새의 품새다/ 분명 딱새 새끼 주둥이 같은 노란 소식 들어 있겠다”(「햇살 한 통」)라고 삶의 적막감을 달랜다. 도토리묵을 양념장에 찍으면서도 “사는 일, 묵 집듯 바들거렸다고 수시로 묵사발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묵」)는다. 자신의 생활 태도를 폄하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꼬마도 언제부턴가 “빈 지게가 더 무겁다”(「포터 마하리」)라는 사실을 쥐똥과 대수리와 새끼딱새의 노란 주둥이와 묵과 묵사발이란 말씨의 음색에 기대어 목메었을 터이다.
  어둠 속보다 환한 세상이 더 무서운 줄을 알고 한세상 건너왔으면서도 “걷고 걸었으나 제자리였다”(「지평선」)라는 고백은 선운사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을까. 극락전 처마 끝에 풍경(風磬)처럼 매달린 나무 물고기를 화자와 동일시하는 시의 내면은 서늘하다. 불가적(佛家的) 연(緣)을 찾기보다는 4차산업에 개인의 정체성이 해체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를 감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처를 모르는 바람처럼/ 가는 곳을 모른 채 평생 헤엄치는 저 물고기/ 저를 알고 싶었겠지요”(「바람과 풍경」)라고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대화와 독백이 섞인 형식이 낯설지 않지만 “바람을 청하는 마음에 몸이 흔들린다”라는 구절에 눈길이 오래 간다. 정체성은 고정된 게 아니라 삶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뀐다는 동적이미지가 더 강하게 함의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성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4차산업이 내미는 코드의 맹점을 짚어볼수록 말하는 사람만 되레 옹색해지는 세상이므로 ‘시’의 실존적 윤리보다 먼저 존재하는 ‘나’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때 다시 바람이 불었을까. 자본과 문명의 이중적 속성에 이골났으면서도 산문(山門)의 안팎을 오가며 ‘종메’에 눈길이 꽂힌 화자의 행위를 바람결에 기댄 것은 아닐까. 바람이 목어를 흔드는지 목어가 바람을 불러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불가적(佛家的) 언어유희와 확연히 다른 이 지점은 뭐든 필연성으로 해석하는 기계 문명적 사유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2.

  시집 『깜깜』 속에 푹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드니 꼬마가 보이지 않는다. 형들에게서 물려받은 헐렁한 셔츠를 입고 도롱테 굴리던 꼬마는 어디로 갔을까. 토박이말과 그 말씨의 음색에 딸린 가락을 몸에 감고 정임이 찾으러 갔을까. 달보드레한 눈빛 건넨 새도 없이 “별이었다가 달이었다가 끝내 티끌이 되어”(「지나간 사람」)서 멀어졌을 정임 씨. 오늘도 어른꼬마는 머루같이 눈을 빛내며 소주 한잔 먹고 있겠다. 아니 춘포역 빈 대합실에 속절없이 앉아서 “몇 동이나 더 눈물을 쏟아야 너를 들어낼 수 있을까”(「연분암」)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겠다. 지그시 눈 감고 “소리 없이 기적이 우”(「춘포역」)는 소리나 들을지 모를 어른꼬마에게 참새 심장같이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리토피아』, 2024년 봄호.


[2024-03-28 09:35:32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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