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초의 시비평 몽당연필] 3.못 본 꽃이 더 아름답다 - 복효근 시집 ‘중심의 위치’ 서평
이병초 시인, 전북작가회의 승인 2023.04.19 14:32
시는 여운의 미학이 아닐까. 시가 품은 내적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를 읽은 뒤에 어리는 여운을 음미하는 맛에 시를 읽는 것은 아닐까. 복효근의 새 시집 『중심의 위치』(실천, 2022, 12.)는 짧은 시 형식으로 긴 여운을 준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것들의 숨소리를 펴 보듯 시의 행간은 정갈하다. 시를 찾아다녔다기보다는 시가 원고지에 저절로 깃들었다는 듯 시상은 자연스럽고 눈썹달, 첫눈, 목련, 고라니, 무당벌레 등등의 시어들이 뿜어내는 색채는 맑디맑다.
이 아침에도
해가 솟는 쪽으로
붉은 나팔 하나 짊어지고
헐떡이며 허공을 기어오르는
맨손의 생(生)은 있다
-「나팔꽃」, 전문.
헐떡이며 “허공을 기어오르는” 맨손에 온기를 불어넣는 시의 배려는 적막하다. 나팔꽃 한 송이에 시의 촉수가 닿는 순간 세상이 정지된 것 같다. 오늘을 굳이 해석하지 않는, 아니 해석할 줄을 모르는 작은 생명이 인간의 삶으로 번지는 시의 울림이라니. 희망이라는 말에 골백번 또 속을지라도 “해가 솟는 쪽으로” 길을 내고자 하는 나팔꽃 생의 숙연함, 여기에 머무는 여운은 고독 한 채를 짓는다.
그러함에도 복효근의 시편들은 꽤 유쾌하다. 노인 요양병원 앞에 무례하게시리 장례식장이 들어섰고(「은유법」), 초승달 보러 또 나간다고 아내에게 혼나기도 하며(「초승달」), 소의 순한 눈망울을 보고 소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도 소고기엔 눈이 없다면서 몇십 년째 소고기를 먹고(「시인이 되어」) 있는가 하면, 침을 놓는 여의사에게(「봄」) 눈길 쏠렸던 화자가 금세 여의사를 잊고 봄비에 묻어온 머릿결 냄새- 첫사랑 그녀의 냄새를 못 잊고 소주병을 따는(「봄비는 힘이 세다」) 철부지 어른까지 살맛 나게 뒤섞여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생은 덤이라는, 모든 이름은 누명이라는, 무릎은 신앙이고 역사라는 역설이 빛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앓는 숨결에 오디 빛깔로 시의 여운이 눈을 틔운다. 그러나 우리는 몇 발짝도 안 가서, 붉디붉은 노을을 보고도 “네가 그립지 않다.”라고 시치미 떼는 반어(反語)를 만난다. 시의 여운이 미소처럼 돋을새김되는 순간이다.
복효근의 시편들에 적힌 서정의 무늬가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의 시 정신은 삶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겪는 오늘을 난파선(「하현」)으로 인화해낼 수 없고, 예초기 칼날이 쑥부쟁이를 피해 가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띠는 눈썹달(「들길」)에 애틋할 수 없다. 사람과 역사와 자연을 궁구하고 음미하는 치열성을 시의 밑그림 삼은 것이다. 이런 정신적 내구력을 자양분 삼았으므로 그의 시편들에 찬찬히 어리는 여운의 미학이 ‘꽃받침’처럼 살뜰한 것이리라.
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출처: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1858&sc_section_code=S1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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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9 17:08:33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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