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초의 시비평 몽당연필] 4.외딴집 한 벌-박형진 시집 ‘내 왼쪽 가슴속의 밭’ 서평
이병초 시인
시는 사물을 자세히 보길 요구한다. 시의 촉에 엉기는 사물의 생김생김이며 빛깔, 길이를 꼼꼼히 살폈을 때 시는 물질화된 언어를 통해 삶에 윤기를 제공할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농사꾼인 자신을 ‘꾼’에 빗대며 미소를 띠는 박형진 시인, 그의 시집 『내 왼쪽 가슴속의 밭』(시작, 2022, 5.)을 읽는 동안 ‘자세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의 시편들은 농사일에 접목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오늘을 바라보는 데 인색하지 않다. 꽃이 필 때도 좋지만 잎이 피어날 때가 더 좋다고 진술하면서 “화려하면 할수록/ 숨겨 있을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 잎 피워낼 때 비로소/ 떨쳐낸 듯 좋더라”에 이른 뒤, “한 가지 분홍색을 싸안으며/ 일어나는 수천의 연두들/ 결국엔 하나로/ 어우러질 줄 아는” 「봄산」의 넉넉한 품에 시상을 집중시킨다.
화려함의 이면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억압당하는 현실이 자연에만 있지 않으며, 시에 적힌 ‘누군가’가 4차산업에 소외된 인간 즉 당신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박형진의 시는 인간 현실을 내색하지 않는다. 수천의 연두색 빛깔로 한 가지 분홍색을 싸안으며 공동체가 된 봄산을 시의 욕망처럼 보여줄 뿐이다. 그러함에도 자연 생태계의 실상은 인간의 오늘에 절실히 닿는다. 이것이 사물을 자세히 읽어낸 시의 생명력이다.
그의 시편들 속 현실은 꽤 바쁘다. 때를 맞춰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 외에도 “낡은 채반에/ 감을 썰어 말리”(「채반」)기도 하고, “순례하듯 하루 한 번씩은 꼭/ 뒤란 장독대에”(「장독대 앞에」) 가며, 쌉쏘롬한 머위를 뜯기도 한다. 시의 진솔함이 뭔지를 보여주듯 가을을 불러오는 소리처럼 “종 같은 깨꽃이 하얗게 고개를 내”(「장갑」)밀며, 나무의 뿌리가 “곰팡이의 자실처럼 하얗게 뻗어 와/ 말을 걸기도”(「다가간다는 것」) 한다는 시의 전언에는 오늘을 찬찬히 응시하는 눈길이 묻어 있다.
이것뿐이 아니다. “지을수록 품삯 달아가는 마당에/ 땅을 놀리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여위어 가다1」)라는 독백도 한다. 몇 푼 안 될 작물들을 사나흘씩 붙잡고 있는 자신을 ‘자벌레’와 동일시하거나, 입춘 눈발이 날리는데도 전화 한 통이 없어 “버릇처럼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열어보”(「심심」)기도 한다. 시의 외딴집 한 벌이 참 쓸쓸하다. 그러나 나락 베는 현장에 다다르면 시상이 돌연 생동감을 띤다. 나락을 베면서 “내 것 네 것이 없고/ 우리 것이어서 비로소 내 것인 것/ 내 것이 없으므로 진정 내 것인 것”이라는 절창에 이르기 때문이다. 소유욕이란 병증에서 벗어난, “바늘 끝만” 하다는 상추씨조차 아끼는 마음결이 공동체를 수확하고 싶은 시의 눈을 틔우는 것이다.
시를 쓰되 ‘자세히’라는 단어에 구속됨이 없고 시단의 문명적 풍토에 눈비음하지 않는 박형진의 언어미학. 그는 자신이 일국(一國)의 시인이자 올곧은 시대정신임을 오늘도 시로써 증명한다.
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출처: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3647&sc_section_code=S1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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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3 18:27:56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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