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초의 시비평 몽당연필] 5.떠날 곳 없는 첫사랑아! - 김영춘의 ‘나비의 사상’ 서평
이병초 시인, 전북작가회의 승인 2023.05.17 15:31
기계문명이 퇴화시킨 시의 영성(靈性)이 회복되고 있다. 김영춘의 시집 『나비의 사상』(작은숲, 2013. 9.)에는 “맑은 깨달음”(「복사꽃 피고」)들이 영성의 옷을 입고 삶의 한기를 덜어내는 시편이 여럿이다.
꽁지 예쁜 새가 문화인의 총을 맞아 ‘울음소리’조차 없게 되었다고 인간의 야만적 이중성을 폭로하면서도(「너무나 인간적인」), “삶이란 시간의 바깥에서도 자라는 나무”(「오동꽃에 입맞추다」)라는 시의 옹골진 자리. 산골에 함박눈이 쏟아져 길이 막혔을 때, 낙심하고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이 길을 내어 어린것들을 길바닥에 내닫게 하는 모습을 보고 “터무니없는 순간에 다시 사람을 믿는다”(「길」)라는 시의 자리.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일 수밖에 없는 슬픈 길항을 견딘 시의 영성이 쌀알처럼 빛난다.
오직 시인(詩人)인 김영춘,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목구멍 속에 가두어도/ 이제 눈물 나지 않”(「새벽」)는다는 시인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러나 시편들 어디에도 욕망이 꼬인 흔적은 없다. 불행한 시절을 통과해온 지식인의 회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쉬운 단어로 구겨짐 없는 시의 형상을 짓고 우표처럼 희망을 건넬지언정 문명적 색채에 기댄, “텅 빈 기표”에 불과한 휘발성 발화도 없다. 시의 자율성을 포기하고 기득권 세력이 구축한 질서에 복무하는 시는 엄밀히 시의 형식을 가장한 ‘행갈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열 살 때의 기억을 떠올린 「숭어 한 마리」에 ‘후들거림’이 네 번이나 나온다. “여시구렁 어두운 산길이 무서워/ 후들거리던 때와는 달랐다”라는 이 후들거림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욕망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염전 일꾼들의 좁혀오는 그물망을 뚫고/ 허리를 휘어 허공으로 몸 날리던” 숭어는 시인과 동일시되는 상관물이다. 이것이 ‘후들거림’을 네 번이나 쓴 이유일 터이다. 숭어는 독자의 가슴 속에서 후들거린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현재의 욕망이 기억 속의 숭어를 ‘설렘’이란 새 숨결로 끌어낸 것이다.
왕나비의 삶은 또 어떤가. “제 생애에 꿈을 이루는 이는 없다”라고 인생을 압축한 뒤 제주도에서 날아올라 멕시코 어느 숲까지 이른 놈은 왕나비 손자의 손자쯤 된다고 시의 활력을 돋운다. “갈매기의 부리와 폭풍우 앞에서/ 나비는 쓰러지며 알을 낳는다/ 살도 피도 없는 날개를 파닥이며/ 목숨을 걸고 날아”간다는, “가야 할 곳을 향해”(「나비의 사상」) 떠나버린다는 왕나비. 몇 대에 걸쳐 목적을 이룬 이 여정을 통해 시의 영성은 역사적 상상력을 넓힌다. 피비린내를 뒤집어쓴 정여립 선생의 평등 세상이 동학혁명으로, 4·19로, 오월 광주로, 6월항쟁으로, 촛불 집회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시인의 붓끝은 역사의 생명력을 놓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가 꿈의 동력이라는 듯이.
삶의 표정이 깃든 눈길로 『나비의 사상』에 활착된 시의 영성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순정이 김영춘 시인의 “떠날 곳 없는 첫사랑”(「첫사랑」)이다.
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출처: 전북도민일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5364&sc_section_code=S1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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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8 09:20:47 에 등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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